최근 한국 사회를 뒤흔든 이슈 중 하나는 ‘런던베이글뮤지엄 청년 직원 사망 사건’이었습니다. 이를 처음 조명한 것은 노동 전문 매체인 매일노동뉴스였습니다.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고인의 실제 노동 강도와 초장시간 근무 실태를 재구성한 매일노동뉴스의 보도는 단순 사건 전달이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라는 구조적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한국 사회를 움직였습니다. 전문성이 축적된 노동 전문지가 아니었다면, 카카오톡 대화 하나까지 모두 분석해 사측이 숨기려던 사실에 접근하는 이런 기사는 나오기 어려웠을 겁니다.
최근 한국기자협회에 해당 기사를 쓴 기자님의 인터뷰가 올라왔는데요. 보면서 좀 뭉클했습니다. 여러분도 들어가서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기자를 준비하는 언론고시생이라면 일독을 권합니다.
https://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59741
이 보도 이후 사회적 공분은 순식간에 확산됐고, 뒤이어 ‘쪼개기 계약’ 실태, 기간제 고용 남용, 고강도 노동 구조가 추가로 드러났습니다. 근로감독이 즉각 이루어졌고, 운영사 측이 사과와 대책을 발표하는 흐름으로 이어지면서 이 사건은 단순 산업재해 의혹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노동 관행 전반을 되돌아보는 촉발점이 됐습니다.
무엇보다 장시간 과로는 개인 책임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는 메시지가 대중과 언론, 국회까지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집요한 취재가 한국 사회 전체를 바꾸는 단초가 된 셈입니다.
이번 사례는 한국에서 노동 전문지가 지닌 존재 의미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규모는 작아도, 깊이는 거대 언론을 능가한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경제·산업 구조의 사각지대를 가장 먼저 발견하는 매체가 바로 전문지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왜 전문지가 살아 있어야 하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준 사례입니다.
한국에서는 전문지나 전문매체가 언론 생태계에서 충분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문화가 유달리 뿌리 깊게 남아 있습니다. 일간지, 방송사, 통신사가 ‘언론의 기준점’처럼 인정받는 반면 철강·노동·환경·의료·과학처럼 특정 분야를 깊이 파는 매체는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러 있습니다. 기사 수준은 더 정확하고, 산업 이해도는 훨씬 깊은데도 사회적 인정이나 정책 영향력은 늘 제한적입니다.
이런 구조가 만들어진 데에는 한국 특유의 압축 성장 과정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동시에 폭발하던 시기, 대중은 빠르고 넓은 정보를 제공하는 대형 종합일간지와 지상파 방송을 ‘기준’으로 삼았고, 기업과 정부·정치권도 동일한 관성을 갖게 됐습니다. 이렇게 종합매체 중심의 체계가 굳어지면서 전문지는 애초에 큰 매체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영향력 경쟁에서 뒤로 밀렸습니다. 전문성이 아니라 ‘덩치와 인지도’가 언론력의 단위로 계산된 겁니다.
여기에 구조적 어려움도 더해집니다. 가장 큰 문제는 광고 시장의 구조입니다. 한국 광고 시장은 재벌 대기업 중심으로 구성돼 있고, 홍보팀은 “노출 숫자”와 “매체 인지도”를 기준으로 광고 예산을 쏩니다. 자연스럽게 지상파·종합일간지·포털 최상단에 걸린 매체가 우선순위가 되고, 전문지는 아무리 업계 영향력이 있어도 규모에서 밀립니다. 해외 전문지가 독자 구독료나 회원제 모델로 생존하는 것과 달리, 한국 전문지는 광고 의존도가 높아 구조적으로 불리합니다.
또 하나는 포털 중심의 뉴스 소비 습관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독자는 네이버·다음에서 뉴스를 소비하고, 포털의 탭 구성은 종합매체에 최적화돼 있습니다. 전문지는 검색 결과에 파묻히기 쉽고, 노출량 자체가 제한돼 구독 기반을 키우기 어렵습니다. 해외는 각 전문매체 웹사이트가 독립된 영향력과 구독경제를 만들지만 한국은 플랫폼 구조가 그 싹을 잘라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는 산업·기술·노동 분야를 ‘전문기자’가 감시하고 비판하는 문화가 약합니다. 예를 들어 철강·조선·반도체와 같은 국가 전략 산업은 ‘비판하면 안 되는 영역’처럼 취급되던 시기가 길었습니다. 노동 문제 역시 정치와 이념 구도 속에 끼어 전문지의 깊은 취재가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웠습니다.
전문지가 사회 변화를 촉발하는 역할을 맡기 위해선 ‘전문가 언론’을 신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한데,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큰 언론이 말해야 진짜 뉴스라는 문화가 더 강했습니다.
정치·관료조직의 정보 소비 방식도 전문지를 더 어렵게 만듭니다. 국회·부처·대기업 홍보라인은 지금도 전문지의 분석보다 대형 신문의 한 단락을 더 중하게 봅니다. 전문지가 몇 달 취재한 기사는 업계 내부에서만 소비되고, 정책 의제까지 번지지 못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결국 전문지는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탁월한 콘텐츠 외에 ‘구조적 장벽’을 계속 넘어야 하는 셈입니다.
반면 해외로 가면 전문매체는 곧 영향력입니다. 단순히 작은 매체라고 해서 영향이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취재와 분석이 그 자체로 공공 의제를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기후·환경 전문매체 Inside Climate News(ICN)입니다. ICN은 직원 20명 규모의 비영리 언론이지만, 2015년 엑손모빌이 1970년대부터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내부적으로 정확히 인지하고도 이를 대외적으로 은폐해 왔다는 사실을 수년에 걸쳐 추적 보도했습니다. ICN 기자들은 당시 내부 과학자들이 작성한 원본 메모, 해상 시추 자료, 사내 브리핑 파일 등을 직접 확보해 엑손은 40년 전 이미 지구 온난화를 예측했다는 사실을 검증했습니다.
이 보도는 퓰리처상 수상으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뉴욕·캘리포니아 등 여러 주 검찰이 실제로 엑손모빌을 상대로 기후 사기 조사를 개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은 전문매체가 세계 10대 에너지 기업을 직접 움직인 상징적 사례입니다.
IT 전문매체 『Ars Technica』의 영향력 역시 결코 적지 않습니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2015년과 2017년에 걸쳐 ‘망중립성(Net Neutrality)’ 규제를 재검토할 때, Ars Technica의 기술·정책 해설 기사가 주요 참고자료로 인용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위원장과 여러 상·하원 의원들이 Ars Technica 기사를 직접 언급하며 논리를 보강했고, 공청회에서도 이 매체의 분석이 반복적으로 인용되었습니다. 기술 전문지의 심층 해설이 미국 인터넷 정책의 방향을 실제로 흔들어놓은 셈입니다.
환경·과학 분야에서는 전문지의 권위가 더욱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Science』와 『Nature』는 연구 윤리, 데이터 조작, 학술 검증과 관련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룰 때마다 각국 연구기관이 즉각적으로 조사에 착수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대표적 사례가 STAP 세포 조작 사건입니다.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연구가 국제적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Nature와 Science의 후속 검증 보도와 전문가 인터뷰가 쏟아지며 연구의 신뢰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결국 연구팀 전원이 조사를 받았고, 일본 학술계 전체가 실험 재현성 기준과 연구윤리 규정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학술 전문지의 분석이 국가 정책과 제도 개선으로 직결된 사례입니다.
노동 및 탐사 전문 비영리 매체인 『ProPublica』 역시 강력한 사회적 영향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ProPublica는 아마존 물류센터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근골격계 부상, 높은 작업 강도, 응급 구조 지연 등을 장기간에 걸쳐 추적 보도했습니다. 기자들은 수백 건의 산업재해 문건과 내부 부상 신고 기록을 분석해 아마존의 낮은 부상 통계는 실제 부상 은폐 구조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보도는 미국 산업안전보건청(OSHA)이 아마존 물류센터를 상대로 이례적인 특별감독을 착수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노동자 안전 규정과 출고 속도 기준을 강화하는 법 개정 논의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작은 탐사 전문매체의 보도가 실제 정책 변화를 촉발한 전형적 사례입니다.
해외에서는 이처럼 규모보다 ‘전문성·깊이·신뢰’가 매체의 공적 영향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전문매체의 탄탄한 분석이 기업의 행동, 입법 절차, 정부 감독 체계를 실제로 바꾸는 사례는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사례들이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전문지의 존재는 단순히 ‘산업 내부 뉴스’를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국가의 산업 구조·제도·정책을 정밀하게 교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전문지가 사회적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면, 산업 감시·기술 분석·환경 문제·노동 안전 등 가장 중요한 분야에서 깊이가 사라지고, 결국 국가적 경쟁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도 이제는 전문매체가 ‘큰 언론이 아니어도 움직일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해외처럼 전문적인 분석과 장기 탐사가 제도 개선의 출발점이 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면, 언론계의 건강성도, 산업의 안전망도 함께 강화될 수 있습니다. 결국 관건은 하나입니다.
얼마나 큰 매체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게 취재하고, 특정 분야에 얼마나 전문성을 갖춘 매체인가를 기준으로 언론을 평가하는 것. 그런 문화가 널리 자리 잡을때, 한국의 전문지는 비로소 제 역할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언론도 좀더 다양화되고, 양질의 기사를 더 많이 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