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돌아갈 순 없어, 그곳으로.
아무리 아름다운 추억이라도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둬야 해.
지금도 생각나지만 그걸로 됐어.
걱정은 없어. 다시 노래 부를 수 있으니까. 언젠가 다시 돌아갈 거야. 나의 집으로
2008년 혜성같이 등장한 일본의 17세 싱어송라이터 시미즈 쇼타(淸水翔太)의 데뷔곡 <HOME>의 일부 가사이다. 이 노래가 어딜 가도 흘러나오고, 모두가 흥얼거리던 때 나는 일본의 야마나시(山梨) 현에 위치한 가무이 미사카(カムイ御坂, 이하 미사카)란 실내 하프파이프 관리 시설에서 디거(Digger, 인공 구조물 관리인)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 역시 이 곡을 수없이 읊조렸다.
당시에는 스노우보드도 곧잘 탔고, 이미 다양한 국가에서 파크 시설을 경험해왔던 터라 그 경험을 기반으로 한국에서 실제로 파크 관리를 했었다. 그때 함께 근무했던 일본인 친구의 소개로 선진화된 파크 관리 문화를 배우기 위해 향했던 미사카. 하지만 친구의 소개로 처음부터 근무할 수 있을 거란 예상은 단번에 무너졌다. 일본의 유명 파크에서도 수년간 대장 역할을 맡아온 이들이 비시즌에 미사카로 모여 다시 하나의 팀으로 운영되던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 진입 장벽이 굉장히 높았다. 그들 사이에는 이미 십수 년간 쌓인 선후배 사이의 깍듯한 위계질서와 단단한 유대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진입하기 위해, 그들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그리고 일을 해서 돈을 벌기 위해 가장 먼저 선배 디거들과 얼굴을 익히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들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기술을 익히기 위한 견습 기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시간들이 지나가는 동안 체류비는 일찌감치 다 써버리고 서서히 빚이 쌓여갔다. 결국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룸을 셰어하던 친구 집에서 나와 미사카 근처의 두 평쯤 되는 빈 컨테이너 박스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 좁디좁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의 생활은 주로 이른 아침의 스노우보딩으로부터 시작됐다. 실제로 자신이 관리하는 코스를 타보는 것이 디거의 기본 소양이고, 직접 손질한 코스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해 보이는 것은 미사카 디거들의 불문율이었다. 물론 난 파크 정비부터 스노우보딩까지 그들 중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량이 부족했다. 오후까지 스노우보딩을 마친 후에는 저녁부터 다시 정비를 시작했는데 저녁부터 익일 오전 영업 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하프파이프를 최상의 컨디션으로 돌려놓는다’는 것이 미사카 디거들만의 룰이었다. 100m에 달하는 하프파이프 코스의 냉동 보존을 위해 일주일에 단 하루 있는 휴일을 빼고는 매일 같이 밤새워 정비했다. 정비에 필요한 두 대의 중장비가 멈추는 한이 있어도(심지어 곧잘 멈췄다.) 인력만으로라도 어떻게든 오전 영업시간에 맞추어 정비를 해 오픈을 시키는 것이 미사카 디거들만의 비결이자, 프라이드였다. 그리고 그곳을 이용하는 고객들 역시 그것이 얼마나 고되고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인지를 알기에 저렴하지 않은 금액을 지불하며 이용했고, 미사카의 디거들을 동경했다. 그렇지만 그런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나는 타지에서 강도 높은 신체 노동과 정신적, 금전적인 압박을 느끼며 피로가 극에 달했고, 그때까지는 접해본 적 없었던 나를 만났다. 아무것도 없는 산길 중턱의 좁은 컨테이너 박스에서 지내며 나보다 한 살 어린 중고 오토바이를 구해 시내의 헬스장을 다니며 씻었고, 골판지 박스를 주워서 테이블을 만들었다. 다행히(?)도 전기는 당겨 올 수 있어서 근처 돈키호테(일본의 프랜차이즈 양판점)에서 하이라이트 레인지를 구입해 간단한 레토르트 요리를 데워 먹으며 살았다.
당시 한국에서의 나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부모님과 좋은 집에 살며 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나는 늘 나름의 스타일을 가지고 여유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미사카에서 만난 나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샌가 나에게 짜증 섞인 말투를 건네는 선배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더는 예전 같지 않은 나를 확인했다. 그리고 당연하다고 느껴왔던 나의 여유로움이란 것을 갖추기 위해선 정말로 많은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함을, 그리고 그것들은 당연하게 갖춰지는 것들이 아니며 그렇지 못할 때의 나는 이전까지 내가 쉽게 ‘구차하다’고 말하던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걸, 아니 그중에서도 으뜸이란 것을 깨달았다.
정말로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지만 수없이 나를 다잡으며 버텨냈고, 쉬는 날엔 비닐하우스를 수리하는 막노동을 겸업하며 어찌 됐든 결국 빚을 다 갚고 미사카에서의 디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오고 나서 수년간 그곳에서의 사진 폴더는 열어보지도 못했다.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때의 고통을 상회하는 고통을 만났기 때문인지, 몇 년이 지나 정말로 ‘그때만큼 힘들다’ 혹은 ‘그때보다 더 힘드네’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쯤 그때의 추억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제서야 사진 폴더를 열 수 있었다. 사진들을 다시 보니 이상하게도 괴로운 마음보다는 그리움이 가득했다.
그 당시 힘들어하던 내게 친구가 “넌 이곳에서도 견뎌냈으니 더한 것도 견딜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해줬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고통을 견디지 않아도 난 잘 살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후로 가끔 힘든 시간을 겪을 때면 정말로 거짓말처럼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시간도 견뎠는데’ 하며 괜한 자신감이 생긴다. 요즘 다시 그 곡을 듣는다. 그때처럼 힘들 때면 그 노래가 떠오르고, 그때처럼 힘들단 걸 느낄 때면 '언젠가는 또 더 힘든 날도 오겠지. 그때가 오면 지금의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하며 묘한 위로를 느낀다.
THE ReeAL MAGAZINE VOL.12 [ HOME ] 2016 / WINTER
SCRIBBLE - MISAKA DIGG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