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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새로운 도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

유럽 올리브유의 위기와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

by 애들 빙자 여행러

최근 마트에서 올리브유 한 병을 집어 들 때마다 잠시 망설이게 된 경험, 혹시 없으신가요? 파스타나 샐러드에 필수적인 이 황금빛 액체의 가격표가 부쩍 부담스러워진 것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닙니다. 지난 몇 년간 전 세계 올리브유 가격은 실제로 수직 상승했습니다.


문제의 핵심에는 수백 년간 세계 최고의 올리브 산지로 꼽히던 지중해,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 농장의 심각한 위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류와 수천 년을 함께해 온 올리브 나무들이 기후변화와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절망적인 소식 속에서, 아주 뜻밖의 장소인 한국의 '제주도'에서 새로운 희망이 조용히 싹트고 있습니다.


팩트체크: '올리브의 종말'은 과장이지만, 위기는 진짜다


지중해 올리브 농장이 겪는 위기는 여러 재앙이 동시에 덮친 '퍼펙트 스톰'에 가깝습니다. 세계 최대 생산국인 스페인은 기록적인 폭염과 가뭄으로 2022-2023 시즌 생산량이 평년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습니다. 땅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고, 수확량이 줄자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이탈리아의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올리브 나무의 흑사병'이라 불리는 '자일렐라 파스티디오사(Xylella fastidiosa)' 박테리아가 남부 지역을 휩쓸며 수백만 그루의 나무를 고사시키고 있습니다. 치료제도 없어 한번 감염되면 베어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에, 수백 년 역사를 간직한 올리브 숲이 속수무책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말'이라는 표현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데이터는 '심각한 위기 속 부분적 회복'이라는 더 정확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최악의 상황을 겪은 후, 2024-2025 시즌 유럽연합(EU)의 올리브유 생산량은 전년 대비 약 29% 증가하며 회복세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히 이탈리아의 경우, 일부 기관은 36% 생산량 증가를 예측하는 반면, 다른 기관은 오히려 27% 감소를 전망하는 등 불확실성은 여전합니다. 지중해 올리브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리스크에 직면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유럽의 재앙이었던 기후변화, 제주에겐 기회가 되다


놀랍게도 지중해 올리브 농장을 위기로 몰아넣은 주범인 '기후변화'가, 지구 반대편 제주도에는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는 극적인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한반도의 기후변화는 제주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40년간 제주도의 여름철 열대야 일수는 18.9일이나 늘어나는 등, 기후대가 온대에서 아열대로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농촌진흥청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바로 이 기후 변화 덕분에 과거에는 추운 겨울을 버티지 못했던 '프란토이오(Frantoio)', '레치노(Leccino)'와 같은 올리브 품종의 노지 재배가 제주에서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제주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습니다. 지중해의 건조함과 달리, 연간 1,600mm가 넘는 비와 높은 습도, 강한 태풍은 올리브 나무에 새로운 종류의 스트레스와 병해충 위험을 안겨줍니다. 뿌리가 얕은 올리브 나무에 방풍 시설은 필수이며, 수분 관리는 지중해와는 완전히 다른 접근을 요구합니다. 이는 제주 농부들이 풀어야 할 또 다른 숙제입니다.


제주는 '가격'이 아닌 '시간'으로 승부한다


그렇다면 제주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를 대체할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생산량 경쟁은 불가능합니다. 2023년 기준, 제주의 올리브 재배 면적은 15개 농가, 약 6헥타르에 불과합니다. 이는 수십만 헥타르에 달하는 스페인의 광활한 농장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규모입니다.


하지만 제주 올리브의 핵심 경쟁력은 '대량 생산'이 아닌 '궁극의 신선함'에 있습니다. 올리브 열매는 나무에서 따는 순간부터 산패가 시작되어 맛과 향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수입산 올리브유가 수확, 착유, 그리고 기나긴 운송 과정을 거쳐 우리 식탁에 오르는 반면, 제주에서는 아침에 수확한 올리브를 당일 바로 착유하여 가장 신선한 상태의 '햇기름'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갓 짰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신선한 풀 향기와 톡 쏘는 매콤함. 이것이 바로 제주 올리브만의 압도적인 무기입니다. 제주 올리브는 대중 시장이 아닌, 최고의 품질을 알아보는 소수를 위한 '프리미엄 틈새 시장'을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이 전략은 단순히 차별화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고 기후적 리스크가 상존하는 제주의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연적인 해법입니다.


'대체'가 아닌 '특별함'을 꿈꾸는 K-올리브


"제주가 새로운 올리브의 성지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프레임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제주 올리브의 목표는 지중해의 '대체'가 아니라,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차별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프랜차이즈 커피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특별한 산지의 독특한 풍미를 지닌 '스페셜티 커피'를 찾아 마시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제주 올리브 역시 대량 생산품이 아닌, 제주만의 기후와 토양이 빚어낸 독특한 '떼루아(terroir)'를 담은 '싱글 오리진' 프리미엄 산지를 지향합니다.


여기에 '청정의 섬'이라는 제주 고유의 이미지와 결합된 '체험형 관광 상품'으로서의 발전 가능성 또한 무궁무진합니다. 제주는 제2의 이탈리아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 미식가들을 위한 '작지만 강한' 새로운 성지가 될 잠재력을 품고 있습니다.


지중해 올리브의 위기는 기후변화가 더 이상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식탁을 직접 위협하는 현실임을 명백히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제주의 작은 도전은 그 거대한 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과 희망의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미래 우리 식탁을 책임지는 것은 과거의 영광을 지키는 노력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땅에 용감하게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도전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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