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보고서>를 받아들고 든 생각들
내 마음이 요즘 많이 지쳐있다고 했다. 사는게 버겁다고, 이제껏 버텨온 모든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고, 갑자기 찾아온 허무와 공허가 나를 감싸고 있어서 조금만 더 가다간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 같다고 말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존경하는 멘토께 <내 마음 보고서>를 추천받았다. 내 마음이 어떤지, 무엇 때문에 힘든지, 나 스스로를 비춰보기 어려우니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사이트를 검색하고 <내 마음 보고서>를 신청했다.
설문이었다. 200~300여개의 객관식과 10여개의(정확하진 않지만) 주관식 항목으로 이루어진. 내 마음을 비춰볼 수 있는 많은 질문들 앞에 최대한 고민없고 솔직하게, 내 마음이 말하는 대로 답했다. 설문은 한 시간 남짓 걸렸던 것 같다. 설문이 완료되자 "2주 후에 보고서가 배송되리라"는 메시지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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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주 후, 나는 내 마음을 마주했다.
한 권의 책에 가까운 (100여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었지만 읽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보고서는 다섯가지 키워드로 '나'라는 사람을 설명했다.
'나'는 항상 새로운 것을 해 나가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고,
'나'는 일에 대해 몰입하고 열정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나'는 '해보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겐 한없이 관대하나 그런 의지를 갖지 않은 사람에겐 과할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고,
'나'는 어려움이 있거나 힘든 상황이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사고부터 하는 사람이어서 어떤 위기라도 적극적으로 헤쳐나가고자 하는 사람이고,
'나'는 새로운 것을 해나가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작은 위기에도 결코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고서는 말했다.
'나'는 힘들거나 어려운 일도 뭔가 논리로 헤쳐나가려 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적 대미지가 축적되어 갑자기 확 힘들어지거나 무기력해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고,
'나'는 '해보겠다는 의지'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 과하게 냉정해서 객관적인 평가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보고서를 넘기면서 내 안을 엑스레이로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장점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외향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니) 내가 가진 생각이나 단점까지 파악해서 분석해 주었다는 점에, 그 부분이 솔직한 나의 모습 중 하나라는 점에 대해 놀랐다.
내 마음을 내가 받아들었을 때, 한 편으론 부끄럽고 한 편으론 후련했다.
내 모습이 고스란히 보여지는 것 같아서. 내 마음이 힘든 부분이 어디서부터인지 조금은 원인을 알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아프지만 아프지 않았다.
'나'의 성향을 분석한 내용 뒤에는 내가 어떤 정신적인 질병(혹은 질환)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는지에 대한 진단 내용이 적혀있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겪는다는 우울증부터 공황장애, 기타 정신적인 질병에 나는 해당하지 않았다. 종합적인 진단이나 스트레스는 '위험'수준에 이를 만큼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아프지만 아프지 않았다. 충분히 극복 가능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위험하다기 보다 위태로웠다. 스트레스가 많이 높았고, 심리적 우울감이 높았다. 병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스트레스 수준이 높아 정신적인 부담이 큰 상황이랄까. 주변에서 최근 들어 유독 예민하다며 상담을 받아보는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다행스럽기도 했다. 내 상황을 객관적인 진단 결과로 받아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리고 시를 읽어 주었다.
한 편으론 병이 아니라 다행스럽고, 다른 한 편으론 지금의 나를 어떻게 편안하게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될 찰나, 보고서는 나에게 시를 읽어주었다.
이성복 시인의 '편지 3'이라는 작품이었다.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다고 나는 말했지요
전설 속에서처럼 꽃이 피고 바람 불고
십리 안팎에서 바다는 늘 투정을 하고
우리는 오래 떠돌아 다녔지요 우리를 닮은
것들이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
가까워 졌지요 영락없이 우리에게 버려진 것들은
우리가 몹시 허할 때 찾아와 몸을 풀었지요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염려 마세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을 거라고 시는 내게 말했다.
시인이 숨겨놓았을 시의 깊은 뜻을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자주 읽어보며 그 뜻을 다시 찾아볼 생각이다.
그리고 보고서는 말했다. 이 보고서를 당신이 가장 이해받고 싶은 누군가에게 보여주라고.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다.
내 마음을 마주한다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마음을 마주한다는 것이. 조금은 다행스럽고 또 한 편으론 당황스럽기도 한 모습들. 좋은 것도 나고, 힘든 것도 나였다. 무엇보다 지금 나의 힘듦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
이제, 나는 내게 물을 생각이다. 무엇때문에 그렇게 힘이 들었냐고, 조금더 스스로에게 솔직해 지자고. 그래야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