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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andra the Twinkling May 11. 2017

자유로운 시절 일기 21

즐거운생활시작. 영국편. 셋 (부제: 이상한 꿈. 둘)

드디어 이사를 했다.

난 이제 어엿하게 플랫에서 산다. 그리고 그 전보다 좀 더 센트럴 런던 가까운 곳에서 산다ㅋ.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흐뭇했다. 예전엔 Nothern Line의 Highgate역에서 가까운 곳에서 살다가 이젠 당당하게 Circle Line내에 산다. 욕실은 공용이었지만. 그리고 방 안에서도 전기를 쓰려면 20p 짜리 동전을 넣고 돌려서 시간을 충전해야 했지만. 그래도 왠지 이제는 나도 독립하여 당당하게 해외에서 살고 있는 한 런더너 유학생 같은 기분이 든다. 

메트로를 보고 찾아다녔던 집들은 모두 엄청 비쌌다. 아무래도 런던이다 보니 그리고 북쪽에서 좀 더 센트럴 쪽으로 더 내려왔으니 비싼 건 당연한 건지 몰라도 등록금만큼 비싼 집에서 살 수는 없었다. 고민 고민하다가 결국 또 필립의 도움을 받았다. ㅠㅠ 이래선 자꾸 신세 지는 것 같아서 우리의 관계가 동등해질 수 없을 것 같아서 불안한데. 필립이 무언가 내가 맘에 안 드는 것을 요구했을 때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으려면 나도 신세를 져선 안되는데... 

알고 보니 필립은 영국에 온 지 좀 됐고, 런던 킹스 컬리지에 입학허가를 받아놓고 그전에 추가로 FCE시험 보려고 우리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미 영국에 꽤 친구들이 많아서 그들 중 한 명이 자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본인이 살던 플랫의 조건이 너무 좋아서 혹시 살 사람 있냐고 물었고, 필립은 그걸 덥석 물어온 거다. 장하다. 정말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내가 살 플랫은 4층 건물의 꼭대기 4층이고(정확히 말하면 그라운드 플로어와 3층짜리 집의 3층) 지붕 밑이라서 영화에서만 보던 천정이 기울어있고 지붕에 창문이 나 있는 바로 빨간 머리 앤에 나오던 그런 방이었다!!! 거기다가 엄청 넓어서 우리나라의 원룸보다도 훨씬 더 컸고 간이 부엌도 있고 붙박이장도 있었다. 여자들의 로망인 아일랜드 식탁도 있었고 ㅎㅎㅎ. 주인은 노부부였는데 50대라서 그래도 젊고 활기찬 분이셨고 엄청 부자이신 듯했다. 1층(그라운드 플로어)의 절반을 식물원으로 꾸며놓고 테라스를 연장해서 완전히 나무들이 자라는 온실로 만들어 놓으셨고, 차고에는 클래식카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자신이 전형적인 영국의 중산층이라고 했다. 응? 중산층이라고??? 이건 그저 문화충격인 것일까??? 클래식카가 있는 중산층이라니... 거기다가 약간 아쉬웠던 건 한국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시더라... 일본은 아시면서. 칫... 뭐, 그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 런던 북쪽에선 그런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긴 하다. 그나마 좀 아는 사람들은 내가 북한에서 왔는지 남한에서 왔는지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찌 됐건, 괜히 빨간 머리 앤이 된 기분이었고, 빨리 친구들을 초대해서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멋있는 곳이었다.  단 하나 적응하기 힘들었던 건 샤워할 때에도 20p 짜리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려서 15분의 시간을 충전해야 했는데, 문제는 한 번에 20p를 넣으면 15분이 지나간 줄도 모르게 갑자기 물이 딱 끊겨버린다는 거;; 40p를 넣으면 시간이 너무 많이 남고 20p를 넣으면 아슬아슬해서 항상 아, 5분만 더... 이런 상황이 되어 버린다는 거다. 방에 있는 전기도 그랬는데, 50p를 넣으면 30분간 전기를 쓸 수 있다. 이건 그런대로 거기 살던 필립의 친구가 본인도 편법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해결해주었다. 집주인 아주머니에겐 미안했지만, 동전을 넣고 레버를 끝까지 돌리지 않고 살살 반 이상 돌리면 시간 게이지의 바늘이 움직이며 시간이 충전된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되돌렸다가 다시 돌리기를 반복하면 시간은 동전 한 개만으로 무한충전할 수가 있었다. 대체 어떻게 발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ㅎㅎ 전기는 마음껏 쓸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린 집에 자주 모였고 다들 하숙을 하고 있었고, 혼자 사는 사람은 료오지와 나뿐이라서 친구들은 엄청 즐거워했다. 자연스럽게 필립도 우리들 사이에 어울리기 시작했고 이 이상한 일본인, 스위스인, 한국인의 집단은 거의 방과 후에 맛집 아니면 우리 집에 모이게 되었다. 그즈음해서 필립의 친구들도 하나 둘 보게 되었고, 필립의 대학 친구 중 한 명이 태국인이었던 터라 굉장한 호사도 누렸다. 그 태국인 친구의 가족이 런던에서 식당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린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을 때면 둘이서 그곳에 자주 갔고, 거기에 자주 오는 필립의 대학 친구들하고도 또 모임 비슷하게 어울리게 되었다. 당연히 거기도 글로벌했다.ㅋ 태국인, 영국인, 아랍인, 대만인, 그리고 필립과 나. 이 시절이 정말 즐거운 영국 생활을 만끽하던 시기였다. 학교가 끝나면 일본인 친구들과 필립과 함께 모여서 숙제를 하고 맛있는 것을 먹거나(물론 언제나 더치페이 ㅎ) 영화를 보고 헤어지거나, 아니면 바로 센트럴로 와서 차이나 타운에서 점심을 먹고 토트넘 코트 로드 역 앞의 슬롯머신이 즐비한 게임룸에 가서 신나게 놀고 저녁은 대부분 그 태국 음식점에서 친구들과 먹고 펍을 가거나 집으로 가거나... 이런 날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니... 너무 놀기만 했나;;;) 뭐, 학교 내의 다른 나라 친구들하고 어울리는 날도 간혹 있었고, 아무것도 안 하고 집으로 가는 날도 물론 있었다.


현실 같지 않던 온통 핑크빛 방에서 해를 등지고 내가 앉아있던 그 꿈은 아주 가끔 꾸곤 했고 처음 꾸었던 날처럼 그렇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거의 같은 패턴으로 놀기만 하는 생활도 지겨워질락 말락 하던 어느 날, 필립이 주말을 함께 보내지 않겠냐고 물었다. 우리가 주말을 함께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조금 놀라긴 했다. 주말이면 나는 대부분 사촌 오빠의 친구들과 만났고, 사촌 오빠의 친구는 본인이 없는 동안 일어났던 사건 때문에 아주 코딱지만큼의 죄책감이었는지 모를 그런 꺼림칙한 기분으로(이 사촌 오빠의 친구는 나를 영국에서 처음 만났으므로 나에 대한 신뢰가 거의 없는 상태이니, 내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믿긴 하나 그 나쁜 형에 대한 우정이나 뭐 둘 간의 친분 때문에 티를 안내는 것일 수도 있고, 여전히 잘 모르겠다.) 주말마다 집으로 초대해서 오빠의 친구들과 함께 바글바글한 집에서 보호자가 참석한 가운데서라고 강조를 하며, 건전한 파티 아닌 파티를 즐겼다. 주방장 아저씨는 당연히 매번 없었고 오빤 항상 엄격하고 무서웠다. 엄한 보호자 역할을 잘 하고 계셨다고나 할까;;; 여전히 그 오빤 내게 무서운 분이다.

처음으로 필립이 주말에 보자고 한 것이 굉장히 반갑기도 했으나, 여하튼 나는 엄하디 엄한 보호자 역할에 충실하신 그 오빠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숙제가 남아있어서 엄청나게 신경이 쓰여 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필립은 여전히 내가 본인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줄 알고 쩔쩔매며 내가 어떻게 해야 너에게 신뢰받는 남자 친구가 될 수 있냐며 물었고 난 오빠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말해야 한다는 걸 떠올리니 식은땀이 다 흘렀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하거나 주말을 영영 오빠와 그 시꺼먼 친구들과 보낼 수도 없어서 똥 마려운데 억지로 참고 웃는 것 같은 표정으로 일단은 승낙을 했다. 


주말이 오기 전에 오빠 친구네 집에 가서 나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고, 그 친구는 주방장 아저씨의 해코지로부터 날 구해줬으며, 그런 일 때문에 가까워진 것이 아니고, 전부터 필립은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현재 우린 사귀고 있다고 아주 장황한 스토리를 주절이 주절이 늘어놓아야 했고, 또 주말엔 오빠네로 오지 않고 필립과 함께 주말을 보내야 하겠다고 얘길이 아니고,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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