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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andra the Twinkling Aug 08. 2018

자유로운 시절 일기 22

즐거운생활시작. 영국편. 넷 (부제: 이상한 꿈. 셋)

Putney (사진 출처: ABSOLUTELY london)


주말 계획을 세워야 해서, 아니, 정확히는 주말 계획에 대해 거짓으로든 진실로든 현재 나의 보호자인 우리 사촌 오빠의 친구에게 외간 남자와 주말을 보내고 싶다고 보고를 해야만 해서 온갖 궁리를 하며 머리를 짜내느라 잠이 다 안 왔다. 

결론은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나도 다 큰 성인인데. 만으로 따져도 난 이제 스물이라고!!라고 자신을 내어보지만, 역시나 엄마와 이모에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빌어야 한다.. 이 너무 무서운 오빠는 다 말할 수도, 아님 엄청 혼을 내고 외출금지를 시킬 수도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모험을 해야 하는가, 거짓을 말해야 하는가 고민을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다른 스토리도 없다. 굉장히 날카롭고 칼 같은 오빠라 거짓이 의심이 되면 바로 전화해서 확인을 해 본다던가 아님 바로 알아차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ㅠㅠ 워낙에 난 거짓말을 하면 티도 나고 거짓말 자체도 항상 엉성한지라...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아마도 솔직한 게 나을 것이다. 

먼저 주말에 오빠 집으로 올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말을 꺼내보고, 분위기가 많이 험악해질 경우엔 Bristol에 있는 X은이 핑계를 대리라 마음먹고, 미리 런던에 놀러 와 있는 X은이의 동생에게 양해를 구해놓아 말을 맞추어 놓았다. 하지만 이 역시 엉성하기 짝이 없다. 주말에 내가 Bristol까지 다녀올 순 없지 않은가;;;

내가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 또 한 가지는, 필립 하고 주말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강했지만, 한편으론 제대로 데이트 한번 안 해본 사이이고, 남자 친구라는 존재는 사실상 처음이기 때문에 단 둘이 보내야 하는 주말이라는 사실 자체가 너무 긴장되고 부담스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이걸 원하는 건가...???



오빠, 전데요. 잘 있었어요? 이번 주말 있잖아요... 이번 주에도 다들 모이죠? 제가 있잖아요..... 말씀드릴게...


아아, 미안한데 이번 주는 안 모인다. 미리 얘기했어야 하는데, 너무 갑자기 연락을 받아서. 너희 오빠가 산토도밍고에서 급하다고 오라고 난리다 야. 미안. 얼른 다녀올게. 짐 싸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애들한테도 빨리 연락 돌려야겠다. 나 없는 동안 말썽 부리지 말고. 


아.. 뭔가 김새는데... 너무 쉽게 지나갔잖아...  시원섭섭하면서도... 오빠가 나를 잡아줬어야 했던 것 아닌가. 나 이러다 후회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무지막지하게 길게만 느껴지던 하루하루가 지나고 드디어 내일이면 토요일인데... 

수업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우리 교실 뒷문이 열리고 필립이 큰 소리로 날 부른다.. 눈치 없는 놈. 이제 와서 거절하는 것도 깨는데... 고민과 부담 따위는 개나 줘버린 필립은 입이 귀에 걸린 채 마냥 신나기만 한가보다. 

언제나처럼 같은 반인 야에꼬와 신타로가 따라 나왔고, 역시나 복도에선 료오지와 준코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excursion 이 pub tour인 거 알아? 신나지 않니? 어느 동네래? 신나게 마시고 클럽 갈까? 아니면 비디오 빌려서 술 사갖고 료오지네 가서 놀까? 너희 집으로 갈까? 오랜만에 central london 갈까? 


다들 신나서 재잘재잘 거리는데, 필립이 불편한 얼굴로 가만히 있다가


나랑 alexandra는 멀리 지방에 오늘 중으로 도착을 해야 하기 때문에 너희들하고 놀 수가 없어. 미안해. 다음 주에 다 같이 놀자. 힘들게 허락받은 거라서. 일단 우리 집에 들러서 챙길 게 있으니까 빨리 출발하자!


자자자자자....잠깐만! 난 아무 준비도 안됐어, 어딜 가는 건데? 그럼 나도 집에 들러야 하는데? 무얼 할 건지 어딜 갈 건지 아무 말도 안 해줬잖아?


음... 좋아. 너희 집에 먼저 들르자. 그렇지만 넌 준비할게 옷밖에 없는걸? 그것도 가는 길에 사도 상관없잖아?


아... 이 진짜 찐따 같으니. 속옷을 어떻게 가는 길에 사니... 쪽팔리게. 그리고 이게 무슨 폭탄 발언이야. 안 그래도 부담되고 부끄러워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데... 여튼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나는 당황했고, 또 쪽팔렸고, 친구들은 다 같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설명을 해보란 표정으로 빤히 날 쳐다봤다. 후...

찐따 폭탄이다.. ㅠㅠ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친구들에게 멀리 가는 건 정말 몰랐지만, 그리고 주말을 함께 보내기로 약속을 하긴 했다고. 그래서 우리 오빠 없는 사이에 다녀오지 못하면 더 이상 나에게 자유로운 주말은 없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번 주는 필립 하고 보내야 한다고. 그렇지만 절대로 결단코 그 주말이 금요일도 포함된 것인지는 나도 몰랐다고 쩔쩔매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해대야만 했다. 

친구들은 아쉬움 반, 기대 반으로 남자 놈들은 너희 진짜 사귀는거냐며 키득대고 여자아이들은 정말 이대로 괜찮냐고, 둘이서 괜찮겠냐고 정식으로 사귀자고 프러포즈는 받았냐며 왜 이렇게 진도가 빠르냐며 엄청 걱정을 했다. 그러면서도 역시나 여자아이들이다. 차가 있어서 이렇게 태우고 다닐 수 있는 남자 친구가 있는 게 부럽다고, 필립 친구들 중에 차 있는 친구 또 없냐며 소개해 달란다. ㅎㅎㅎ;;;

아, 젠장. 우린 진도라는 것 자체가 없다. 사귀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뭔가 약간 서운한 느낌도 든다. 고마움과 미안함 때문에 내가 끌려다니고 있는 건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도 해봤는데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인지는 정말 나도 모르겠다.


아이들과 대충 작별인사를 했고, 필립에게 난 우리 집에 들러야 한다고 우겼고, 나 혼자 올라가서 대충 옷가지를 챙겨 내려왔다. 


우리 집은 east putney 야. 아마 네가 우리 집을 방문하는 첫 번째 여자가 될 거야. 


들뜬 필립은 가는 내내 조잘조잘거렸다. 

내 귀에 필립의 말소린 거의 들리지 않았다. 우리 사인 뭐가 잘못되었어. 중간이 없어. 가운데가 텅 빈 느낌이야. 중간 절차가 빠졌다고...!! ㅠㅠ 무언가 로맨틱하게 남자 친구와 썸을 타보는 게 소원이었던 나에게 이건 정말 불공평한 전개였다. 너무 빠르잖아. 첫 연애나 다름없는데 썸도 없고, 사귀어 달라는 고백도 없고 이건 뭐... 공짜로 팔려가는 억울한 느낌???


필립네 집에 도착했다. 

(사진출처: Live True London)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1층에 카페가 있는 낡은 건물이었다 싶었는데 들어와 보니.....

남자 혼자 사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깔끔해서 놀랐고, 인테리어가 예사롭지 않아서 놀랐고, 전망이 너무 좋아서 놀랐다. 거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너무나 익숙한 솜씨로 당연하다는 듯이 홍차를 준비해준다. 그러곤 잠시 기다리라고, 준비할 게 있으니 마음껏 집을 둘러봐도 된다고. 숨겨놓은 시체 같은 건 없다며 아저씨들이나 할 법한 농담을 던지곤 방으로 뛰어갔다. 


근데...

이 조마조마한 마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한 느낌이 드는 건...???

조심조심 집을 둘러보는데 왠지 기시감이 든다. 기억이 날듯 말 듯.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준비를 다 한 필립과 집을 나서려는데,

티팟의 홍차를 크림과 함께 thermos에 담아서 나에게 안겨주고, 필립은 thermos와 가방 때문에 양팔이 자유롭지 못한 날 한번 끌어안고, 내 두 눈과 이마에 입을 맞추며, 


너의 두 눈이 나만을 바라볼 것이고, 너의 머리는 나만의 꿈을 꿀 것이라고 방금 주문을 걸었어. 주문을 풀기 위해선 너가 내 주문을 찾아내야 해


라는 이상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곤 싱긋 웃었다.

역시 이놈은 찐따가 맞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 어디 가는데? 이렇게 서둘러?


우리? 맞추면 너가 좋아하는 인형 엄~~~ 청~ 사줄게. 


응? 인형? 갑자기 내가 왜 인형을 좋아한다고 결정한 건데?;;


폭신폭신하고 털이 보송보송 난 커다란 인형을 싫어하는 여자도 있어? 거기 가면 인형 뽑는 기계 엄청 많아. 나 그거 정말 잘 뽑거든? 얼마든지 뽑아줄 수 있어.


........................ 헐, 이거 찐따 맞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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