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 수 밖에 없었던 폭력적인 세월
어린시절, 나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그때도 지금도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결코 자랑스러울 수 없는, 그리고 나이가 어리면 어릴 수록 부끄럽기에 아주 충분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가난이 지속되어 그 상황속에 젖어들게 되면 그것은 당연시 되어 나의 가난이 불행한건지 수치스러운건지 조차 알 수 없게 된다. 나의 어린시절이 그렇지 않았나 싶다.
그 당시 내가 살던 동네 사회복지센터에서는 수급자가정을 대상으로 반찬을 나눠주곤 했었다. 우리를 위해서라도 수급자 생활에서 벗어나려 부단히 노력했던 엄마의 의지와는 달리 형편이 좋아진다는건 참 어려운 일이었고, 유치원~초등학생 그 사이쯤을 살고 있던 나는 누군가의 연락으로 사회복지센터에 반찬을 받으러 갔었다.
지금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사회적약자에 대한 배려가 참 부족했었다. 아니, 어쩌면 그 당시 수급자들을 위한 반찬 배부를 담당하는 직원의 의식수준이 모자랐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런 상황들이 합쳐져 나는 모든이들(하다못해 민원인들까지)이 보는 앞에서 반찬통을 받고, 후원자에게 감사편지를 쓰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는게 당황스러웠지만 그곳에 상주했던 직원들이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다썼어?" "다쓰면 말해"라고 말하는 바람에 그 상황이 나에게 폭력적이라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며,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은 수치심이고 그들이 나에게 한 행동은 방어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 특히 어린아이를 상대로한 폭력이라는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의 부단한 노력으로 우리는 수급자 생활에서 벗어났고 한동안 내가 수급자였다는 기억조차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평범한 남들 사이에 섞여 권태로움에 빠져있는 나를 신이 발견한걸까, 지금의 학교에서 예상치 못하게 급식비 등 여러가지 필요경비를 학부모에게서 수납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고, 그 업무에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 중 지원받을 수 있는 아이들이 확정되면 환불을 해주는 일도 포함되어있었다.
사실 아무 생각 없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귀찮았다. 애초에 학기가 시작하기전에 딱 명단을 확정지어 돈을 안걷었으면 환불해줄 일도 없을텐데 왜이렇게 지원자 확정을 늦게해서 한달, 두달, 내가 환불해줘야하는 돈만 많아지게하는거야, 라는 불만이 계속 쌓여갔다. 그리고 마침내 지원대상자 학생들이 정해졌고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환불절차가 시작되었다.
우선 지원대상자 학생들중에 그동안 수납한 내역이 있는 학생들을 추리고, 수납방법에 따라 분류하고, 몇번 다시 확인하고 거의 다 끝냈을 때쯤 갑자기 기분이 이상했다. 끝끝내 미수납한 지원대상자들이 업무담당자로서는 일을 덜어줘서 다행이다 싶어야 하는데, 그들이 아닌 한 달 한 달 성실하게 수납한 지원대상자들 명단에 더 눈이 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지원을 받는경우는 내가 어렸던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별다르지 않다. 물론 지원의 폭이 한층 넓어지긴 했지만, 몇십년전 기준 역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내 아이가 학교생활을 하면서 최소한 친구들이 누리는건 누리게 해주고 싶은 마음, 아이가 배우고 싶다고 하는건 배우게 해주고 싶은 마음, 비록 생활이 어려워도 미납자의 꼬리가 붙게 하고 싶지는 않은 절박한 마음, 우리엄마 역시 품고 있었을 간절한 그 마음이 몇만원 안되는 그 수납내역에서 갑자기 느껴졌다.
한간에는 요새 수급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너무 많아서 되려 힘들게 일해서 사는 사람들보다 더 팔자가 좋다는 말도 떠돌지만, 글쎄, 얼마나 편안한 생활을 해서 그런말이 떠도는지는 나는 모르겠고, 그럼에도 묻고싶은 질문이 하나 있다. 자녀를 가진 부모로서 내가 능력과 조건이 된다면 굳이 수급자의 삶을 살고 싶을까? 내 아이에게 수급자이기 때문에 지원받는다는 지원대상자라는 꼬리표를 붙여주고 싶을까? (물론 지원받는게 부끄럽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응원한다. 힘든 상황에서도 꼬박꼬박 교육비를 수납하고, 하루하루 아이를 위해 노력하는 그 삶들을. 가슴깊이 응원하며, 그들이 수급자에서 벗어나 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날이 곧 오기를, 그래서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권태로움속으로 젖어들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