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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을리 Jul 04. 2024

2024년 4월 (1)

어쩌다 여기 오게 되었을까


뉴욕에 살고있다. 맨하탄이 조금조금 보이는 동네에서 맨하탄으로 출퇴근을 한다. 대학생도 가르친다. 세상에. 여전히 돈은 없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진짜 인생이란 희한하다. 


#1. 내가 좋아하는 것과 거리가 먼 것 같은 이 도시

날 정말 행복하게 하는 건 내 발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한 오후에, 노을이 번지는 고즈넉한 마을을 혼자 종종거리며 걷는 것이다. 깨끗한 공기를 습 들어마시며 거기 실리는 땅냄새, 풀냄새 맡으며 새소리 들을 때 오는 절대적인 안정감이 있다. 희한하게도 이건 삶에 의미를 바로 부여해 준다. 질문 없이 그저 느끼게 된다. 그래서 고민이다. 박사를 하는게 맞을까 하는 고민이 든다.


#2. 캘거리에서 다시 학사를 한 이유 그리고 미국으로 석사를 왔던 이유

집안 통장을 까본 일은 없어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어쨌든 자주 싸우며 돈을 언급하는 부모님 밑에서 케이-장녀로 자라,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을 가고 어쩌다 대기업에도 가고 가계에 보탬이 되는 짓들을 계속 해온 나였기에 나에게 대학원은 좀 언감생심 꿈같은 거였다. 언젠간 가고 싶지만 당장 가면 안 되는. 그리고 그냥 공부를 하기 위해 가서는 더더욱 안되는? 그렇기에 5년 전 퇴사를 했을 때 바로 무작정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30년 인생 간절히 기다려 온 것을 그렇게 홀랑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었다. 모든 일에 단계가 있지. 정갈한 마음을 하고 학사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진로 고민을 할 시절에 상담 선생님은 두손을 들고 나를 말렸다. 왜 힘든 길을 가려고 하냐, 한국에서 석사 하는 것이 누가봐도 안정적이고 더 나은 결정인 것을 (해외로 박사를 갈 것이라는 전제 하에). 그때 나는 뭔가 목구멍에서 꾸역꾸역 올라오는 어떤 울분같은걸 참으며 이것도 좋지 않아요? 이것도 좋으니까요. 하고 말하다가 마지막에 하고싶은 말 더 없냐는 얘기에 맘을 토해내며 울어버려서 그분을 당황하게 했던 것 같다. 내가 마침내 하고싶은 것 좀 내 방식대로 해 보겠다는데, 왜 단 한명도 날 응원해주지 않아요? 그냥 잘 될거다 잘 할거다 해주면 안돼요? 하고 질질 울었다. 갖고싶던게 달랐다. 나는 서른에 17살이 해야 하는 고민과 결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30살에게 해줘야 하는 조언이 먹힐리가 없었다. 한국의 다른 교수들도 굳이 왜 학사를 하냐며 그냥 자기 랩에 오라는 교수도 있었다. 와보니 그 분들 말이 다 맞았다. 박사 연구에 학사 공부는 딱히 필요가 없다. 게다가 코로나가 터져버리는 바람에 내가 생각한 '외국에서의 학창시절!' 같은것도 다 누릴 수 없었다. 피같은 등록금이 너무나 아까웠다. 어떻게 어떻게 코로나 기간에 생긴 스트림을 통해 영주권은 신청했는데, 6개월만에 나온다던 영주권이 2년 넘게 걸렸고 (ㅋㅋ) 결국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거리에서 보낸 그 8개월의 시간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나답게 보낸 시간이었고 평생 후회하기가 좀 힘들 것 같다. 시간낭비 돈낭비 맞는데 그것들을 낭비하면서 적어도 그 8개월만큼은 내 자신을 낭비하는 일들을 막을 수 있었다. 발목까지 덮는 눈을 폭폭 밟으며 아무도 없는 침엽수 가득한 강변 길을 록키산맥을 배경으로 깔고 걷다가 노을을 보고, 호도독 한번 자켓이랑 부츠 털어주고 베이글에 커피한잔 때리고 도서관 벽난로 옆에서 책읽으며 캘거리로 돌아가는 차를 기다렸던 내 평범한 겨울의 주말들을, 후진 아파트거나 반지하여도 들어가기만 하면 좋은 냄새에 깨끗한 집에 맛난 음식이 반겨주는 내 친구들의 집에서 밤늦게까지 숟가락 들고 노래부르며 웃고 떠들던 시간들을, 세계 최고로 귀엽고 사랑스럽고 똑똑한 검은 고양이와 같은 침대에서 자고 아침이면 발코니에서 지나가는 트램 보고 한번씩 지붕위로 올라가 산책하던 그 날들을 도대체 어떻게 후회하겠는가.


후회로 남을 지 잘한 일으로 남을 지 알 수 없는 결정은 그 도시를 뒤로하고 대학원을 위해 미국으로 온 것이다. 캘거리가 너무 사랑스러웠지만 캘거리에 살기 위해 연구주제를 타협하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운명이란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 연구 같이 하고 싶었던 한 명의 교수가 내 졸업학기에 아파버렸고, 그래서 아마도 캐나다의 다른 도시로 가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결정을 해야하는 기간인 4/15를 딱 하루 남겨두고 웨잇리스트에 있던 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내가 합격했다고 했다. 그때는 진짜 운명같았다. 다시 한 번 가고싶었던 워싱턴 근처의 (아님) 아름다운 캠퍼스를 가진 (이건 맞음), 내게 딱 맞는 연구주제를 가진 (이건 그럭저럭) 교수님이라니. 그러나 캘거리에서 보낸 8개월동안 반짝거리던 내 멘탈은 이 학교에서의 2년으로 인해 정말 개박살나게 된다. 


#3. 아이비리그 애들과 공부하면 좀 뭐가 다를까? 하고 시작했던 깡시골 난리부르스

이 개구렁텅이에서의 나날들은 거의 직장생활하고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개같은 나날이었는데 정말 구사일생으로 내 동기 중 흑인 여자애가 하나 있었고, 그녀의 존재가 특권의식과 편협함으로 가득찬 백인들이 사는 겟아웃 동네에서 나를 그야말로 살려주었다. 그녀의 연구주제를 듣고 나랑 뭔가 잘 맞을 것 같아서 내가 먼저 같이 밥 먹자고 했던건 2년 석사생활동안 내가 한 일 중에 제일 잘 한 일이었다. 내 지도교수님도 분명 사람 좋고 내 말이라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어주었고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었지만 그녀의 동기부여와 소속감 부여에는 한계가 있었던 반면에, 같은 동기였던 애가 나랑 똑같이 (백인들은 좋아 죽는) 이 동네를 끔찍하게 느끼고 괴상하게 느낀다는 것, 그리고 다른 동기들을 이상하게 느낀다는 것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미국으로 석사를 가기로 한 이유들 중에는 내가 학벌충이라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대한 선망이 좀 있었다는 것 (석사를 아이비리그에서 했다는 얘긴 아님) 그리고 캘거리에서도 그런 미국에 대한 선망을 좀 봤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었다. 특히 백인들이 백인/서양문화를 인간과 인간문화의 기본값으로 놓고 (이거 한국에서도 진짜 많이 알려져야 한다. 심리학 논문에서 있었는데요 하면서 인용하는거 좀 우려할만한 일임) 백인을 연구하는 학문이 심리학인데 그중에서도 대부분의 연구가 미국인을 연구하는 미국인의 작품이다보니 캐나다에서는 심리학과 대학원생들이 자기가 변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좀 있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한다는 연구가 어떤 건지 좀 궁금했고 보고싶었다. (와서 보니 '큰 물'이라기 보다는 그냥 지들이 노는 물이 거기밖에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뉴욕 롱비치가 호주 본다이비치보다 좋은건 아닌데 사람들은 더 많을 수 있으니.. 딱 그런 느낌) 어쨌든 미국 심리학에 돈주는 석사 프로그램이 잘 없다 보니 박사는 못갔지만 스펙은 뛰어난 애들이 이 프로그램에 들어오는 경우가 왕왕 있었는데 실제로 내 동기들은 대다수가 아이비리그나 알아준다는 리버럴아츠칼리지 출신이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얘네들은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잘할지 궁금했고, 그런 애들이랑 딸리는 영어로 수업에 앉아있으면 (+ 10살 더먹은 노인으로..)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실제로 겪어보니 똑똑한 애들은 정말 똑똑했다. 한국에서도 못 본거 아니지만 미국에서 똑똑한 애들은 머리 잘돌아가는거에 사회생활하고 운동기능이 같이 탑재되어 있어서 같은 cpu여도 한국애들이 노트북이면 여기 애들은 졸라 큰 데스크탑 같았다. 겁나 쌩쌩하고 계속 돌아갈 수 있음.. 일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논문도 찍어내는데 리딩도 정말 꼼꼼하게 해오고 인사이트 있는 질문, 발표 하고 다른애들에게 친절하고 그랬다. 철학 논문을 읽다가 다음날 파이썬을 배워도 하나도 못 따라가는게 없더라. 동기부여가 되고 배우는게 많아 즐거운 것보다 기분이 처참했던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그 때는 걔가 100점 만점에 150점정도 되는 애라는게 인지를 못했었기 때문이다. 같은 동기니까 99점정도라고 생각하고 걔에 비해서 나는 50점도 못하니까 때려쳐야 된다고 생각했었지. ㅋㅋ 지금 박사 동기중에도 잘난 애들 많고, 컬럼비아 갈 일도 생기고 이래저래 아이비리그 출신들하고 랩에서 볼 기회도 얘기할 기회도 많지만 여기 날고기는 애들과 비교해도 석사 동기중 몇몇은 대단한 애들이었던 것 같다. 갭 차이가 크니 같이 공부했던 걸로 감사할 뿐인데, 10년 전에 이런 환경에 노출되었으면 적어도 영어가 엄청 늘었을텐데 라는 아쉬움은 있었다. 맨날 술 먹으러도 같이 다녔을거고.. ㅎㅎ


여하튼간에. 잘난 사람들과 있으면 나 자신이 잘난 것 처럼 느껴지고 점점 잘나질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닐거라는걸 확 배워버린 곳이 석사과정이었다. 내가 석사과정 전에 몰랐던 것은 잘난 집단에 있는 것만으로 잘나지려면 그 집단에 소속감과 애정을 가져야하고 그 집단으로부터도 집단의 일원이라는 끈끈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거였다. 애초에 내가 속한 집단에 그런걸 가져보려고 하지 않아서 몰랐다. 근데 있어보니까 이 잘난애들이 존재하는 집단에 끈끈함이 없으면 희한한 경쟁과 가십문화가 생기더라. 난 늙어서 다행히 그 소용돌이에서는 빠져있었지만 이것들은 친하다고 같이 살다가도 뒤에서 욕을 하고 (ㅋㅋ) 누군가 잘되면 앞에서는 축하해주고 뒤에서는 항우울제 먹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정말 매일같이 보고 심지어는 같이 살던 그녀들은 모두가 그곳에서 남친을 찾아 같이 멀고 먼 주로 이사를 갔고, 내가 아는 한 그들은 이제 더는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 


#4. 갑자기 뉴욕

이런 난리부르스를 뒤로 하고 선택한 박사과정은 정말 모든것이 석사과정과 반대였다. 나란 인간 어쩜 이렇게 극단적인지. 사실은 아예 미국을 포기하고 호주로 가려고 호주 박사 컨택도 했었고 그렇게 목놓아 외치던 멜번에서 어 너 와도 되겠는데? 했을때는 머릿속에 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멜번은 갔었으면 지금쯤은 좋아했을 것 같긴 하다 (그리고 아마 졸업이 박사 1년 남았겠지 3년이 아니라..? ^^) . 그런데 멘탈이 닳고 터져있던 상황에서 내가 컨택한 교수와 줌미팅을 했을 때 느껴지던 어떤 싸-함의 벽은 나를 필요이상으로 부정적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입학하고 수퍼바이저 바꾸는것도 가능했을 수 있는데 말이다. 암튼 거기에 좀 필요이상으로 나에게 올인하는 사람을 만나 어영부영 뉴욕으로 오는 결정을 하게 된다. 1년만 해보고 안되면 말지 뭐, 하는 생각이었고 뉴욕에 와서 반년간은 ... 그 앞의 2년보다 더 힘들고 빡센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ㅋㅋㅋ)


결정을 하면서 한번 가봐도 괜찮겠다 생각했던 것은 뭔가 장점들이 고만고만하게 여러분야로 나뉘어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뭔가 한방 큰건 없는데 분산투자라 잃을것도 크게 없었던 느낌이었다. 예를들면 학교 시설은 똥같아도 교수 수가 진짜 많은데다가 옮기는것도 자유로워 보여서 여차하면 연구주제나 담당교수를 바꿀 수 있는 게 큰 장점이었고, 거기에 지도교수가 참 사람이 괜찮아 보였다. 이건 지금도 맞는 것 같긴 하다. 똥고집이어도 사람은 정말 착함.. 내 지도교수 미들네임은 아마도 '애는착해'가 아닐런지. 가장 좋았던 건 2학년이었던 동기들이 둘다 국제학생이었다는 것인데 석사기간동안 국제학생은 커녕 아시안도 찾기 힘들었던 나에게 이들과 얘기하는건 진짜 큰 위안을 줬다. 


도시가 더럽고 번잡하지만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어서 차없이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고, 상상초월로 비싼 도시는 맞지만 사람이 많은 만큼 싼 곳도 얼마든지 찾으려면 찾을 수 있었다. 거기에 학교 수업 자체는 퀄리티가 똥망으로 보였지만 박사과정간에 학점교류시스템이 있어서 다른학교에서도 2학년부터는 교차수강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남자친구가 니가 생각하는 것만큼 별로인 학교 아니고, 넌 잘할 거고, 내가 전적인 서포트를 해주겠다고 하는 것도 당연히 아주 큰 이유가 되었다.


(가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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