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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럼 May 27. 2016

난 내 무대에서 노래를 거부할 수 있을까?

모두가 원하고 있다 해도 그 노래를 부르진 않을 거예요

난 내 무대에서 노래를 거부할 수 있을까?

요 근래 아는 사람만 아는 그래서 나는 몰랐던 어느 뮤지션의 작은 공연을 보았다. 좁은 공간 속 수줍게 노래를 이어 나가던 그는 어느 곡을 불러 달란 관객의 요청을 수줍게 거부했다. 머뭇머뭇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며 에둘러 넘어갔지만 이유는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모 드라마에 삽입되어 그의 노래 중 음원 순위가 가장 높았을 노래였는데 그 노래로만 자신을 기대하는 것이 싫었던 거겠지. 이런 작은 무대에선 오롯이 자신이 원하는 것만 부르고 싶었을 테니깐.

그 노래가 없었어도 그날 그의 무대들은 모두가 좋았지만 계속해서 그 수줍던 표정이 생각난다.


'그 노래가 내 전부는 아니야. 넌 그 노래밖에 모르겠지만 사실 난 이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야'


그 관객에게 이런 수줍은 외침이 충분히 전달되었을까? 나야 어차피 다 몰랐던 노래라 상관없었지만.

그날은 작은 무대의 작은 일일 뿐이었지만 큰 무대에서 수많은 관객들이 있었던 자리였으면 어떨까? 음악이 좋아 홍대를 배회하는 뮤지션들이 미디어를 탄 노래가 자신의 대표 곡이 되고 무대에서 그 곡을 강요받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지금까지 불러온 노래들이 부정당하는 느낌일까 드디어 보상을 받는 느낌일까?


밥벌이 앞에서 이런 고민은 대부분 우스운 고민일 될 뿐이지만 아직 작았던 그 무대에서 그 뮤지션은 자신의 행복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작지만 많은 관객들이 오롯이 그의 노래에만 귀를 기울이는 장면은 관객인 나에게도 꽤 근사한 경험이었다.


대충 뭐 이런 분위기 (출처 - 제비다방)


어느 인터뷰에서 왜 음악활동을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난 친구들이랑 항상 노래를 부르고 음악활동을 해왔다는 윤영배의 대답이 인상 깊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 그것으로 뮤지션일 수 있구나 그것으로 끝일 수 있구나. 수많은 관객 속에 노래를 부르며 감동과 공감을 주는 게 뮤지션의 이상이라는 편견을 깨 주었다.


그날 이후 관객이 1명이라도 있으면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겠다는 비장한 말을 하는(혹은 했던) 이들이 퍽이나 위선적으로 느껴진다. 그렇게 음악이 좋으면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어울려 부르면 되지 왜 꼭 관객을 세우려 하나. 무대에 대한 욕망에 당위를 부여하려는 말인 것 같아 조금 우습다.  그냥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 된다는 평범한 진리는 이처럼 많은 순간에 소환된다.


 웹진 보다의 윤영배 인터뷰 중에서


일개 관객일 뿐인 나는 그를 동의할 마음은 없다. 나야 내가 원하는 걸 보고 싶으니깐. 사실 그날에도 그 뮤지션이 우스웠다. 그깟 노래 부르고 말면 되지 그게 뭐라고. 이승환도 천일동안을 불러야 관객에게 밥값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던데.


다만 내 삶의 무대에서 나 역시 그처럼 오롯이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을 굳이 거절하는 이유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어서란 사소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작은 순간조차도 오롯이 나를 위한 결정으로 채워질 수가 있을까?


아마도 어렵겠지. 나야 아직 까진 모두가 원하는 노래를 부르려 노력하는 것에 익숙하니깐. 다수가 편해질 수 있다면 내 고집 정도가 대수일까, 난 그렇게 살아왔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임을 안다. 다만 그날 그의 수줍던 거절의 표정을 몇 번 따라 해 본다. 내 무대를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던 그 거절의 표정을.


'모두가 원하고 있다 해도 그 노래를 부르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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