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남매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꿀 Jun 18. 2020

너의 발은 안식년 중

아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둘째가 태어난 지 63일이 되었습니다. 화자를 바꿔 봅니다. 내가 둘째 엄마가 된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군요. 배를 째고 녀석을 낳을 때의 고통은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끔찍했던 고통이 이젠 정말 생각나지 않습니다.


"아기를 낳고 나면 아픈 게 싹 사라져. 금은보화와도 안 바꿀 예쁜 아기가 있는데 그깟 고통쯤이야. 그래서 넷이나 낳았지 뭐."


친정 엄마가 심심찮게 해주던 말씀입니다. 당시 미혼이던 저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너무나 극심한 고통을 겪었는데 왜 다시 고통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아이가 예뻐서라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종종 우리들에게 화를 내는 엄마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날의 엄마는 우리 때문에 몹시 고통스러운 듯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예뻐 다시 고통을 택했다니요. 엄마의 말이 모순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엄마는 신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요. 생명을 계획 아래 창조해낸 신과 달리 엄마는 사랑과 환희, 기쁨으로 우리를 창조했다는 것을요. 그렇기에 말 안듣고 말대꾸하는 우릴 보고 '버럭'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다는 것을요. 아니, 엄마가 되어 보니 알겠습니다. 어쩌면 저희를 낳은 것을 후회했을 수도 있다고요. 아주 짧게, 잠시나마 말이죠.


수유를 하며 둘째의 발을 봅니다.

'세상에나, 이렇게 작을 수 있다니!'

새삼스레 감탄 합니다. 매일 보니 익숙해졌나 봅니다. 녀석의 손과 발이 작다는 걸, 매일 봤더니 그만 까무룩 잊어 버립니다.


힘차게 엄마 젖을 빨던 아가는 힘이 든지 발차기를 쭉쭉 해댑니다. 그러곤 발가락을 꼬물꼬물 거립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사진에 담습니다. 엄마는 이 순간을 절대 잊고 싶지 않다고 다짐 합니다.


백설기처럼 보들보들한 둘째의 발. 이 발에도 언젠가는 굳은살이 생길 것입니다. 걸은만큼 정직하게 말이죠.



01. 아들에게


아들아, 오늘은 네가 태어난지 63일째 되는 날이야. 엄마가 '남매의 엄마'가 된 지도 63일째 되는 날이지. 너희들을 낳고 엄마의 삶에는 '인칭 변화'가 있었어. 항상 '주인공 시점'으로 살았는데 어느날 부터인가 '3인칭 시점'이 되었지. 너와 누나의 시점 말이야.(가끔 아빠 시점도 포함 ㅎㅎ)


우리 아가. 너를 만났던 그 날을 기억해. 엄마는 네가 몹시도 신기했단다. 누나를 낳으며 겪었던 고통을 다 잊어버린 것처럼 어쩐 일인지 누나의 어릴 적 모습도 엄마 머릿속에서 지워져버린 거야.


삶은 '현재진행형'인지 엄마 눈에는 세살 누나의 바로 오늘 모습만 또렷해.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말자, 박제해 놓자 다짐하지만 그 뿐이야. 내년이 되면 올해의 너희들 모습이 얼마나 그립고 보고 싶을까? 이 생각을 하면 인간이 지닌 한계가 느껴진단다.


너는 누나의 과거이기도 해. 아니, 모든 인간의 과거란다. 포동포동하고, 여리고, 연약한 존재. 너를 보며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예전엔 이렇게 작고 여린 아기였겠구나 생각해. 그런 생각을 하면 인간이, 생명이 얼마나 놀라운지 몰라. 경이롭고, 놀라워서 때로는 너무나 버겁기도 . 생명이란 그런 거야.



어른이 된 너는 상상이나 할까? 너의 발이 이렇게 작고 보들보들했다는 것을 말이야. 청년이 된 네 발은 지금보다 훨씬 크고 탄탄할 거야. 굳은살이 박이고, 어쩌면 검게 그을렸을 수도, 관절이 살짝 변형됐을 수도 있지.


엄마는 네가, 발을 살피는 인생을 살길 바라. 아무리 바빠도 한 번씩, 아주 가끔씩은 네 발을 살피는 거야. 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장 낮은 곳에서 고단히 걸음을 옮긴 너의 발을 말이야.

 

발을 살피게 되었을 때 비로소 주변의 작고 연약한 것들이 눈에 들어올 거야. 작고 낮은 것들을 격려해주는 사람이 되길.


엄마 손바닥보다 작고, 연두부만큼 보드라운 너의 발을 보며 다시 생각해. 인간의 발이 이토록 보드랍고 연약할 수 있는 것은 딱딱한 을 밟지 않아서라고. 돌이 지나 걸음마를 떼고 나면 네 발에도 탄탄한 무게가 실리겠지.


조물주가 인간을 설계하며, 직립보행하는 데 '1년 여'의 시간을 준 까닭은 어쩌면 쉬지 않고 고생할 발에 대한 연민 같은 게 아닐까. 이를테면 발에게 '안식년 휴가'를 생의 첫 1년으로 정해준 것이지.


네가 살아온 삶과 정직, 성실이 아로새겨질 너의 발이 엄마는 참 궁금하다. 삶의 무게가 벅차거나 중력을 잃고 휘엉청거릴 때, 이 사진을 보렴. 때 묻지 않은 순수의 결정체를 말이야. 그럼 힘이 날지도 몰라. (*)


2020.6.18.

서재에서 엄마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