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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식 Nov 07. 2019

달건이

②편입니다.

달건이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사료를 내놓기 시작하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고양이들이 몰려왔다. 한꺼번에 우르르 오는 게 아니라 한 놈씩 시차를 두고 와서는 오도독 오도독 사료를 씹어 먹고 갔다. 대략 10마리 정도가 우리 집 식객으로 파악된다. 배에 새끼 서너 마리를 품은 것으로 보이는 임신부도 두 마리 있고, 만 한 살이 안 되어 보이는 작은 놈도 거의 매일 후다닥 왔다가 후다닥 먹고 사라진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놈은 우리가 '스노우'라고 이름 붙인 녀석이다. 아직 어린 놈인데, 까만 줄무늬에 배 부분의 하얀 털이 목 뒤까지 올라와 있어서 대충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나중에 훨씬 더 하얀 놈이 나타났으나, 그 녀석은 우리 집 단골이 아니라 뜨내기로 판명돼 스노우가 이름을 유지하게 됐다.) 다른 고양이들이 식사 때만 주로 오는데 비해 스노우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밥도 먹고 덱에서 왔다갔다 놀고, 유리문을 통해 우리 집 안을 기웃거리기도 하는 녀석이라 우리 식구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스노우 말고도 우리 집 사료를 제일 먼저 먹었다고 해서 '원조'(식당이 아니고 손님)라고 불리는 까만 줄무늬 고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 귀여움이 폭발하는 호박색 줄무늬 '동글이'가 단골로 분류돼 이름을 갖게 된 녀석들이다. 그리고 이 글의 주인공 달건이도 그 중 하나다.


난생 처음 고양이를 눈여겨보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먼저, 어린 녀석들일수록 민첩하다. 이 놈들은 걸어 다닐 때도 종종종 종종종 걷고, 웬만하면 호로록 호로록 뛰어다닌다. 또 어릴수록 귀엽다. 그래서 가끔 오는 임신 고양이 두 놈이 몸을 푼 뒤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나타나면 어떨까, 몹시 기다려진다. 마지막으로, 모든 고양이는 예쁘다. 그냥 예쁘거나, 몹시 예쁘거나, 귀여우면서 예쁘거나, 새침하게 예쁘거나, 못 돼 보이면서도 예쁘다. 심지어 좀 별로인가 싶은 녀석도 눈을 크게 뜨거나 고개를 살포시 돌릴 때는 반드시 예쁘다. 내가 본 고양이는 다 그랬다. 딱 한 놈, 달건이만 예외였다. 이 놈 때문에 위의 명제는 살짝 바뀌어야 했다. '거의 모든 고양이는 예쁘다.'


처음 산 고양이 사료가 도착한 9월 17일. 고양이 몇 마리가 세숫대야에 담아놓은 사료를 먹고 갔고, 이윽고 달건이가 덱 왼쪽에서 슬그머니 나타났다. 덩치도 큰 녀석이라 움직임이 남달랐다. 날카로운 눈빛, 주위를 경계하는 듯한 느린 움직임, 마치 먹이 사냥을 앞 둔 호랑이의 자세였다. 게다가 오른쪽 눈은 애꾸 아닌가! 한 마디로 사납고 더러운 인상이었다. (첫 조우에서 '인상이 고약하다'고 다소 온건하게 표현한 건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잘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에구, 뭐 저런 놈도 다 오나. 하지만 길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제공하기로 '인자한' 결정을 내린 뒤라 인상이 안 좋다고 밥을 안 줄 수는 없는 일. 그냥 먹고 가게 놔 뒀다. 다만, 원조나 스노우처럼 귀여운 녀석들이 더 자주 우리 집을 방문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희망 섞인 기대는 배신당하는 법이다. 달건이는 바로 그 다음날부터 우리 집 덱을 사실상 점령하기 시작했다. 퇴근을 먼저 한 아내가 사진을 하나 보내왔다. 덱에서 달건이가 떡하니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헉! 사료 그릇은 비어 있었다. 잔뜩 먹고 햇살 좋은 덱에서 늘어지게 한 잠 자는 모양이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지만, 눈은 애꾸고 살은 디룩디룩 쪘으며 얼마나 게으른지 배는 축 늘어진 사나운 녀석이 우리 집을 점령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부아가 좀 났다. 이러다간 뜻하지 않게 이 놈의 집사 노릇이나 하는 건 아닐까? 경고를 좀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 저거 덩치 큰 놈이지? (아직 이름이 없을 때다.)

= 어.

- 사료 더 안 줬는데 저러고 있어?

=어.

- ㅋㅋㅋ 잠깐 나가 보면 후다닥 도망갈 걸?


다시 말하지만, 모든 희망 섞인 기대는 배신당하는 법이다. 


= 문 열었더니 다섯 걸음 뒤로 갔어.

- 도망 안 가고? 그런 다음엔? 빤히 쳐다 봐?


아내는 대답 대신 사진을 한 장 더 보냈다.


 

무서운 놈이었다. 


달건이 ③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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