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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식 Nov 06. 2019

달건이

 ①편입니다.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잡은 전원주택으로 십 수 년만에 다시 돌아왔다. 이사하고 한 달쯤 됐을까? 쓰레기를 버리고 집으로 오는 내리막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길 건너편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터벅터벅' 걸어 올라왔다. 내가 내려가는 속도와 고양이가 올라오는 속도가 비슷했다. 그렇게 터벅터벅 걷는 고양이는 처음 봤다.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났다. 고양이를 계속 쳐다 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양이도 날 흘끗 쳐다 봤다. 둘 사이의 거리는 대략 10미터쯤, 잠시 눈이 마주쳤으나 그리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곧 집으로 들어갔고, 고양이도 계속 터벅터벅 제 갈 길을 갔다. 노란색 줄무늬에, 제법 덩치가 있고, 자기보다 몇 배나 큰 사람을 쳐다보면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는, 전혀 귀엽지 않고 오히려 첫 인상은 조금 고약하기까지 한 친구였다. 


첫 만남의 잔상은 오래 남았다. 사람과 같은 속도로 터벅터벅 걷는 고양이라니... '자기를 동네 주민으로 생각하나? 이 동네 고양이들은 다 저런가?' 그러나 동네에 길고양이는 많았고, 심지어 덩치 크고 노란색 줄무늬를 가진 놈들도 몇 있었지만, 다들 뛰어다녔고 사람을 보면 더더욱 잽싸게 달아났다. '터벅터벅' 걷는 녀석은 더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사는 마을은 전원주택 100채 가량이 한 데 어울려 있는 곳이다. 산 아래 입구에서 중턱까지 옹기종기 집들이 들어서 있고, 집 옆으로는 숲이나 밭, 들이 있는 구조다. 그래서인지 마을에는 길고양이들이 많다. 우리 집 마당 쪽으로 나 있는 덱 위로도 길고양이들이 왔다갔다 했다. 내가 덱으로 나가면 화들짝 놀라 달아나곤 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동물을 조금 무서워하던 아내도 있고 해서 놈들이 나타날 때마다 나도 소리를 질러 쫓아냈다. 그러던 어느날 상처 입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식구들이 막 저녁 식사를 마쳤을 때였다. 평소 고양이를 좋아하던 아들이 다이닝룸 바깥 덱에 고양이 한 마리가 왔으며 등에 심각해 보이는 깊은 상처가 있음을 발견했다. 심각한 상처라니? 세 식구가 놀라 유리문에 붙어 서서 살펴 보니 아니나다를까 등에 깊게 할퀸 자국이 나 있었고 피도 보였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봤다. 고양이는 놀라면서 몸을 피했지만 멀리 달아나지는 않았다. 너댓 발짝 거리, 즉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애처로운 눈길을 내게 보내고 있었다. 녀석은 간절하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도와주세요.'


집에 고양이 사료가 있을 리가 없었다. 급히 냉장고를 뒤지니 아들 아침용으로 준비해 둔 닭가슴살 소시지가 있었다. 사람 먹기 위해 만든 것이라 밀가루와 고추도 약간 섞여 있었지만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급하게 썰어 작은 그릇에 담아 냈다. 검은 고양이는 처음 마주친 이의 호의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였고, 우리가 자리를 피해 준 사이 소시지를 다 먹고는 사라졌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녀석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상처는 좀 아물었는지, 밥은 얻어 먹고 다니는지 걱정이 됐다. 고양이 마니아인 아들은 "상처가 너무 깊어 생존이 쉽지 않아 보인다"는 냉정한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상처의 크기로 볼 때 같은 고양이들끼리 싸운 건 아니고 자기보다 덩치가 훨씬 큰 다른 짐승, 우리 동네에 많은 큰 개에게 당한 부상이 아닐까 싶었다. 녀석을 떠올릴 때마다 안타까움이 쌓여 갔지만, 다시 오지 않으니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 가족은 고양이들과 본격적으로 연을 맺게 된다. 우리 집에 드나드는 길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제공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달건이가 왔다. 그 터벅터벅 걷는 고양이 말이다. 


달건이 2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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