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거나 부르거나 달리거나
"hi"
"where are you?"
"at the lobby"
"I'm coming."
"ok"
그랩(grab)으로 부른 차를 기다리며 기사와 채팅 중이다. 동남의 우버로 불리는 차량공유서비스. 지도에서 내 위치를 설정하고 가고 싶은 곳을 누른 뒤 확인 버튼을 누르면 가격이 나온다. 대부분 합리적이고 저렴한 가격이다. 대중교통이 부재하고 느닷없이 차가 밀리는 발리에서 그랩이 없다면 여행비의 반 이상을 교통비에 탕진할지도 모른다. 발리에는 그랩과 고젝(Go jek) 두 업체가 있는데 그랩이 고젝보다 가격이 좀 더 비싼 편이다. 발리에 도착한 다음날, 그랩으로 부른 차를 타고 근처에 있는 까르푸에 가기로 했다. 우리를 태우러 올 기사가 확정되면 지도 위에 기사의 차가 나타나고,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그리고 차가 우리에게 오는 모습이 게임 화면처럼 생중계된다.(세상 참 좋아졌다)
미국을 여행할 때도 우버(uber)와 리프트(lyft)를 번갈아가며 유용하게 이용했다. 후발주자 리프트는 첫 가입 시 할인 바우처를 제공했는데, 나와 남편이 각각 따로 가입해서 사용했더니 두 번이나 할인 찬스를 쓸 수 있어 우버보다 리프트를 더 자주 탔던 것 같다(이게 바로 후발주자가 살아남는 법). 미국 역시 뉴욕처럼 메트로나 버스가 대부분의 지역을 커버하는 곳이 아닌 이상 다른 도시에서는 렌트카가 없으면 이동이 어렵다. 우리도 LA나 샌프란시스코처럼 도심에 있을 땐 트램이나 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도시와 도시 사이를 이동하거나 외딴 곳으로 갈 땐 렌트를 했다.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교통수단이 미비한 도시일수록 차량공유서비스의 호응이 높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미터기로 가격이 오르는 택시와 비교해 픽스된 가격으로 차를 탈 수 있다는 건 택시가 차량공유서비스를 이길 수 없는 정말 매력적인 장점이다.
하얀색 중형차 한 대가 숙소 앞에 도착했다. 앱에 적혔던 차량의 번호와 기사의 얼굴을 확인하면서 차에 올라탔다. 시원한 에어콘 바람이 나왔다.
"으 좋다."
발리에선 언제나 '이동'이 문제다. 대중교통이 열악하다는 사실은 알고 왔지만, 그냥 '알고만' 왔다. 가서 렌트를 하지 뭐 싶었는데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발리의 주요이동수단은 스쿠터. 모두가 스쿠터를 타고 다닌다. 그랩을 운전하는 아저씨도 택시 운전사도 집에 스쿠터가 한 대씩 있다. 장기 여행자들은 대부분 스쿠터를 빌려서 타고 다닌다. 우리도 남편과 나 둘이면 고민없이 그렇게 했겠지만 단호를 안고 스쿠터를 탈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미안했다. 한국의 친정 부모님이 알면 '애를 죽일 작정이냐고' 화를 낼 것 같았고, 나도 겁이 났다. 그렇다고 차를 빌리자니 그게 더 위험하다. 발리에 사는 지인에게 '렌트는 어떻겠냐'고 묻자 '죽겠지'라는 짧은 답변이 돌아왔었다. 그렇다. 우리와 핸들이 반대 방향인데다 메뚜기처럼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스쿠터가 많은 발리에선 어쩐지 차가 더 위험한 듯 보였다.
그럼 걸어다니면 되지
덕분에 발리에 도착한 후 열흘 정도는 주로 도보를 이용했다. 여행을 할 땐 두려움 없이 걷는 스타일이었다. 싱가포르에서 혼자 두 달 정도 지낸 적이 있는데 일부러 고행을 택한 사람처럼 하루에 10km 이상을 걸어다녔다. 젊은 혈기에 선크림도 바르지 않아서 한국에 돌아오니 얼굴이 기미가 잔뜩 꼈다. 남편도 800km에 이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왔다. 당시 남편은 슬로바키아에서 몇 달 정도 일을 한 뒤 한국에 들어오기 전 유럽 한 곳을 여행할 생각이었다는데, 그 수많은 형태의 여행 선택지 중에 굳이
‘걷기’를 고른 것이다. 그렇게 걷기에 인색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아이를 메고 걷는 건 도보 여행보다는 체력 훈련에 가까웠다. 그것도 30도가 넘는 땡볕 아래 10kg가 넘은 아이를 안고 걷자니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는 운동선수가 된 것 같았다.
내 앞에 메달려 있는 게 같은 무게의 모래였다면 금세 포기했겠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기를 안고 걸으니 그나마 가능했다(무겁지만 무겁지 않았다). 아이가 더울까 행여 타지 않을까 걱정이 될 뿐. 사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보니 체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한국에서는 지하철 계단만 올라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는데 여기서 그 정도 계단은 정말 껌이었다. 우리는 아기를 메고 가파른 경사의 계단식 논인 뜨갈랄랑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짧은 트레킹을 하기도 했다(이 기세를 몰아 새벽에 출발해 일출을 보는 발리에서 두번째로 높은 바투산 트레킹을 가볼까도 했지만 밤 산행이라 너무 위험할 듯 해 포기했다). 특히 우붓에 있을 땐 다운타운에서 크레센도처럼 점점 높아지는 언덕 위에 있는 우리 숙소까지 왕복 2km를 하루에도 몇 번씩 걸어서 이동했다. 일주일 정도 그 길을 걸어다니자 자연히 밥도 두 그릇씩 먹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역시나!) 힘들어도 걸어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만날 수 있다. 길가의 수 많은 개똥과 어디선거 갑자기 튀어나오는 애완닭들, 아기를 안고 걷는 나를 격려의 눈빛으로 인사해주던 나와 똑같이 어린 아이를 안고 있던 발리 엄마들, 그리고 느닷없이 나타나는 가이드북에는 없던 장관이나 재미난 벽화, 동네 아이들의 너무 예쁜 얼굴까지 길가에 보석처럼 숨어있었다.
하지만 결국 일주일 뒤 우붓에서 스쿠터를 빌렸다. 걱정이 많았지만 스쿠터를 타고 달리는 순간 너무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 깜짝 놀랐다. 단호는 처음에 스쿠터가 출발하자 몸을 부르르 떨면서 내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나즈막히 '우우우' 하며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길가를 쳐다보다 다시 얼굴을 휙 내 가슴에 파묻기도 했다. 너무 무서운 게 아닌가 걱정이 됐지만 한번도 운 적은 없었다. 그 뒤로 스쿠터를 타기 직전에는 이게 뭔지 안다는 듯이 '으으으' 소리를 내며 내게 밀착했는데 알고보니 장난을 치는 거였다. 뭔가 재밌는 걸 하기 전에 긴장되면서도 신이 난 듯한 '으으으'였다. 물론 며칠이 지나자 그런 소리조차 내지 않고 익숙해졌다.
사실 아기를 데리고 스쿠터를 타는 데 용기를 준 건 발리 사람들이었다. 스쿠터가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발리에서는 아주 어린 아기를 태우고 다니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둘째가 맨 앞에 서고, 그 뒤에운전하는 엄마, 엄마 뒤에 막내 그리고 맨 끝에 큰 오빠가 아기를 잡고 네 식구 이상이 한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사람들이 탄다고 그게 곧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이 땅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느껴졌다. 다행히 남편은 오토바이를 좋아해서 한국에서도 바이크를 자주 몰았었고, 어린시절 신문배달을 하느라 자전거보다 오토바이를 먼저 배운 경력자였다. 든든한 어깨를 잡고 타니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는 듯 했다.
스쿠터를 빌리면서 발리 생활에 좀 더 여유가 생긴 느낌이었다. 갈 수 있는 곳이 많아졌고 무엇보다 그 시간이 정말 시원했다. 꾸따나 시내를 달릴 땐 매연이 심해 사고보다 그게 더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우붓에서는 스쿠터를 타고 달리면 넓은 논과 키 큰 야자수 그리고 파란 하늘이 쏟아져내렸다. 이런 풍경을 매일 보고 살아가다니! 우붓 사람들이 무척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