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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혁 Sep 04. 2015

'이 여자'가 '저 여자'가 되는 순간

세상에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는 그 말, 맞는 말일까

0.                                                                                                                                 

실연의 아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내에게 그의 친구가 이렇게 위로한다. "이봐, 그 여자 말고도 세상에 여자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이걸 위로라고 하고 있다. 사내가 잃어버린 것은 '이 여자'다. 포인트는 '여자'가 아니라 '이'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은 그렇게 밖에는 위로할 수가 없다. 유일무이한 '이 여자'가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 '한 여자'로 전락될 때 고통은 사라진다. 철학자들이라면 단독성('이 여자')이 특수성('한 여자')로 바뀔 때 실연은 극복된다, 라고 정의할 것이다.

대개는 그리 되게 돼있다. 그 사내, 조만간 또 다른 '이 여자'가 나타나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 동안 미망 속을 헤맸노라고. 세상에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는 말, 결국은 맞는 말이 되고 만다.

_「느낌의 공동체」(신형철)



1.

그렇지, 내가 한 여자에게 부여한 단독성이 사라지는 순간, 스스로를 위로할 새도 없이 상처는 치유된다. 아니, 치유된다라는 표현보다는 망각된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이 여자'라는 내가 느끼는 독보적 존재감이 망각되며 다른 여자 또한 내 미래의 '이 여자'로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하지만 내가 겪은 몇 번의 경험은. 경험 속에서 조우했던 몇 몇의 사람, 여성은. '이 여자'라는 나의 독보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여자'로 결코 전락하지 않음에도 나에게서 멀어졌다. 그래서 "그래, 세상에 여자는 많지"라는 자기합리화 혹은 자기망각 같은 치유보다는, 체념 혹은 추억 속에 담아두는 방식으로 그들과 이별했다. 그런 이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래, 세상에 여자는 많지"라는 이유로 이별에 순응하는 것은, 뜨거웠던 삶의 한 순간을 '상처'라는 치유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행위같아 싫다. '이 여자'와 함께했던 시간과 감정과 교감에 대한 예의가 아닐 듯 싶다.

그래서 "그래, 세상에 여자는 많지만 너 같은 여자는 없을거다.", "하지만 너도 나도 다른 사람과 함께 이와 같은 혹은 이 보다 더 큰 행복을 또 겪을 수 있을거야."라는 구구절절하지만 존중이 담긴 자세가 더,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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