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ha를 지나는 길
나는 패키지여행도 좋아한다.무던한 마음가짐과, 단체쇼핑을 요령껏 즐길 수 있는 아량과, 주도권을 가이드에게 기꺼이 넘기는 건전한 수동성을 갖춘다면 다른 모든 불편함을 덮고도 남을 매력적인 여행비용으로 명소들을 섭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잘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우리 셋뿐인 이번 여행의 주도권은, 애초 계획부터 여러가지로 패키지여행의 정반대 성격이었으므로, 당연히 나에게 있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이번 여행을 주도권을 쥔 쪽은 뜻밖에도.구글맵이었다.
피하와 무리와이는 직선거리로는 퍽 가깝지만, 길이 직접 연결되지가 않아 역ㄷ자 모양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간이 꽤 많이 걸릴 것 같아 그냥 지나칠까 했지만, 예전 피아노라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피아노가 놓여있던 이 해변이었기에 잠시만이라도 들렀다 가기로 했다.
왕년에 영등포로터리에서 운전연수를 받았으며 멀미나도록 구불거리는 산길에서 오른쪽 핸들의 캠퍼밴까지 몰아봤으니 난 이제 어떤 상황에서도 운전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그러나... 생각해보니 영등포로터리에서 오른쪽핸들 캠퍼밴은 아직 자신이 없다ㅎ
이제 이 산만 넘으면 피하해변이 보일 것이다. 산 정상을 넘어가는 길. 우리는 우와~~ 소리를 내며 차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 두 개의 기둥같은 바위 산 사이로 넓은 부채꼴처럼 펼쳐진 해변. 낮고 얕아보이는 파도가 연이어 계속 밀려와 새파란 바닷물색에 하얗게 선명한 호의 줄무늬를 새겨내고 있었다.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풍경에 차를 잠시 멈춰두고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하지만 여행사진책에 실린 사진이 여행을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사진에는 그 바다가 주는 느낌을 잘 담을 수가 없다. 특히 나같은 일상사진가에게는. 눈으로 담은 풍경이 오래도록 남길 바라며 저 바다에 피아노는 못 담궈도 발은 한 번 담궈봐야하지 않겠느냐며 남은 길을 서둘 러 내려갔다. 해변 주차장에 주차해두고 어제와 같은 흑사장해변을 달리다시피하여 바다가까이로 가보니...위에서는 낮고 넓게 펼쳐지듯 보였던 파도가 실은 우리를 잡아먹을 듯 높고 세차서 놀랐다. 여기가 서핑 고급자 코스쯤 되는 듯 몸 좋은 서퍼들이 지천에 널려있었으나ㅎㅎ 처음보는 세찬 파도와 파도를 즐기는 인파를 뒤로하고 우리는 마침 바다와 강물이 만나는 얕고 따뜻한 물놀이 지점을 발견했다. 준모 말로는 이런 곳을 기수역이라고 한단다. 저런 거친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이 이토록 잔잔하고 따뜻하다는 게 이상하다. 한 쪽에서는 인간의 무모한 도전을 부추기고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작은 아이들의 물장구와 모래놀이를 품어주고 있는 이 바다. 준모는 흑모래폭탄을 대량생산하고 준현은 입은 옷 채로 물에 들어가 노느라 정신이멊다. 옷 젖는 거 진저리내시는 분인데...아마도 이곳이 준현이 마음에 딱 들었나보다.
한 시간을 놀다보니 배가 고파 캠퍼밴 안에서 간단히 빵과 컵라면으로 늦은 점심을 먹으니, 산길운전의 긴장이 포만감 으로 무장해제되면서 슬 졸음이 왔다.
30분만 자리라 얘기하고 눈을 붙였는데 아뿔사! 일어나니 벌써 6시가 넘었다. 시계도 보지 않고 대충, 해가 남아있는 모양으로 4시쯤 됐겠지 했는데....늦어도 홀팍에 5시에는 도착하게 하라던 하림선배 말씀이 떠올랐다. 그러나 우리가 가려는 와이토모까지는 약 3시간. 홀팍 문닫는 시간을 훌쩍 넘는다! 급히 목적지를 약 두시간예상되는 해밀턴으로 수정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해밀턴 홀팍에 체크인을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