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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네 경지 May 14. 2018

이드로부터 해방된 기투존재, 폴 (3)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Attila Marcel)>; 존재와 기억

아버지 마르셀, Attila m'harcèle

 유년의 기억에서는 어린 폴의 시점에서만 상황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비친 아버지는 말이 적지만 질투가 강하고, 때문에 어머니를 해칠 것만 같은 위험한 존재로 투사된다. 이러한 기억은 비단 기억 속 어머니뿐만 아니라 폴 자신에게마저 위해를 가하는 억압적 존재로 비친다.

 실제로 폴은 아버지에 대한 무서운 기억이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만큼, 영화의 원제 또한 아버지 이름인 <Attila Marcel>이다. 아틸라 마르셀은 폴에게 있어 이드, 즉 원초아(元超我) 그 자체이다. 영화에서는 기욤 구익스가 아틸라 마르셀과 폴 마르셀 두 명의 연기를 함으로써, 자아는 원초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음을 장치적으로 보여준다.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는 듯, 삽입된 음악 중에도 <Attila Marcel>이 있다. 거칠고 강한 남자를 노래하는 가사는 꼭 아버지 마르셀을 묘사하는 것 같다. 

 그러나 거친 남자(Attila m'harcèle)를 노래하는 것 같으면서도 언어유희로써 사랑 노래의 남자(Attila Marcel)처럼 들리듯, 과거 속 아버지조차도 영원히 용서하지 못할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다. 어머니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 같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사실 레슬링 연습을 하는 프로 레슬러의 모습이었다. 질투도 그만큼 자기 부인을 많이 사랑했던 모습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이를 알게 된 폴은 자신을 위협했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해방되고, 피아노 연주에서 또다시 환상을 보게 되며 이드의 극복을 예술적 승화로 실현한다. 







무엇이, 누가 유다인가? A travers le Juda

 아슬아슬하게 33세의 나이에 피아노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거머쥔 폴. 이젠 더 이상 청산해야 할 과거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행복을 함께 공유하고 싶었던 마담은 폴에게 찻잎과 마들렌을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여전히 행복감에 취한 폴은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찻잎과 마들렌과 장난감을 준비한다.

 자신을 행복한 과거로만 인도했던 찻잎을 통째로 입에 털어 넣는 모습은 흡사 마약에 취해 그것 없이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중독자의 모습이다. 그런 그에게 보인 기억의 단편은 향수(鄕愁)가 아닌, 야수(野獸)처럼 부모를 덮친 피아노,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던 폴의 이모들이다.

 폴의 부모가 피아노에 깔려 죽은 현장을 목격하고도 그것을 숨기고 폴에게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재촉한 이모들, 행복한 기억, 그리고 행복한 기억만 보여주었던 마담의 차는 돌연 한 순간에 폴을 배신하고 만다. 이제 폴은 세상이 아닌, 자신의 삶 자체에서 내동댕이쳐진 존재가 되고 만다.









예수의 부활과 이드의 극복

 청년부의 최전선에서 광휘와 함께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폴.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그에게 썩 친구 이지도 않았던 피아노로 인해 부모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부모를 덮쳤듯, 폴마저 집어삼키는 피아노. 행복을 느끼게 해 준 과거의 기억과,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한 피아노를 등지고 그가 찾아간 곳은 웃고 있는 마담 프루스트의 영정사진 앞이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그녀에게 수리한 우쿨렐레를 바치러 간 것이다. 그때에 빗방울에 튕겨 소리를 내는 우쿨렐레를 다시 바라보며, 그는 우쿨렐레를 스스로 ‘선택’한다.

마담에게 우쿨렐레를 바치는 폴

 이제는 피아노 위에 앉아 작은 우쿨렐레를 품고 연주를 가르치는 그의 모습을 통해, 그가 외부로부터 주어졌던 것 기억, 피아노로부터 벗어나고, 용서하고, 극복했음을 알 수 있다. 더 이상 폴은 유년의 성장 기억에 한정된 에고가 아니다.

 행복한 기억뿐만이 아니라 악몽 같은 기억이 자신을 집어삼켰던 걸 알기에, 그는 현재와 미래라는 희망을 품고 기억의 상자로부터 해방될 것을 선택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부활했듯, 그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그러나 자유와 책임으로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실존적 존재로 거듭난다. 








자유로운 선택을 한 이들에게 박수를

 필자는 언젠가 영화 <Blade Runner>를 보고 토론하는 때에 한 발언을 들었다.


 “나라는 존재는 기억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어제, 한 시간 전, 바로 방금 전 무엇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떠올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땐 공허해지곤 한다.”


 필자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망각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망각의 존재이다. 존재의 부정은 망각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자에게 있어, 기억은 그저 과거의 사건일 뿐이다. 때문에 그것을 유용하게 해석한다면 추억이 되는 것이고, 나쁜 기억도 삶의 디딤돌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삶과 비례하게 늘어나는 기억의 집합을 ‘유의미한 추억’으로 재조직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있다. 때문에 망각은 기억의 소실이 아닌, 선택에 의한 하나의 결과이자 현상일 뿐이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은 그때의 토론을 상기시킨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삶은 공허해지는가? 폴의 지난 33년의 삶이 과거를 명확히 기억하지 못해서, 그래서 공허한 것으로 표현되었는가? 필자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존재는 기억으로 환원될 수 없다. 기억은 해석될 뿐이다. 살아가면서 행하고, 기억하고, 기대하는 모든 행위와 주체적인 선택에는 자유와 책임이 따른다.

 폴이 피아노를 내려침으로써 피아노는 그의 손을 망가뜨리지만, 더 이상 그는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원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좌절 또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순간 그가 진심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우쿨렐레를 선택한다. 그리고 폴은 선택을 강요당했던 피아노 위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한다. 이러한 극적 해소를 통해 마담 프루스트는 관람자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기억이 곧 나인가? 아니면 나라는 존재가 기억을 가진 것인가? 기억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에서 책임을 다해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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