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을 가득 채운 연꽃 (출처: http://cwfoodtravel.blogspot.com)
인도네시아에 대한 인상은 찌는 듯한 더위와 언제 풀릴지 모르는 교통체증이었다. 그런 나와는 달리 클레망은 인도네시아의 발리에서 무언가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땅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많은 힘을 갖게 되는 서양식 면적 개념과는 대립되는 정신적, 수직적 정원이 그것이다.
두 개의 설주가 모여 문을 이룬다 (출처: Kharl Anthony Paica on Unsplash)
또한 그는 선과 악처럼 두 개의 설주가 모여 문을 이룬다는 점에 주목한다. 우주의 구성요소들을 수직으로 읽거나 대립되는 가르침들에서 통일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동양의 사유에 접근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이 세계관은 중국 사상의 유산인 선禪 정원과 일본 교토의 료안지로 옲겨간다. 바람이 옮긴 모래를 다시 갈퀴로 긁어 정돈하는 행위에서 세계를 다시 만들려고 애쓰는 만다라를 발견하기도 한다.
료안지의 고산수 정원 (출처: https://kinukake.com)
정원사 없이는 정원이 존재할 수 없듯 명상가가 없다면 중국 쑤저우의 왕스위안網師園의 명상공간은 소멸될 것이라 말하는 그. 이어서 일본 정원을 다룬 『사쿠테이키』의 일부 내용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정원이란 인간이 커다란 깨달음에 이르는 데 필요한, 즉 꿈 저 너머에 있는 실재를 인식하는 데 필요한 수단들 중 하나다
그가 칭찬해마지 않았던 베르사유의 공간을 고작 '외관의 예술'로 치부해버린다.
같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문명은 정신적 여행을 할 수 있는 힘을 인간에게서 끌어내기로 한 반면 이미지에 매혹된 또 다른 문명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복잡한 외형에 만족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 보여주는 매개자가 정원의 역할이라면, 이때 정원사는 어떤 위치를 차지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