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boutjina Jul 18. 2024

작은 화원에 살던 아이의 이야기

나만의 소중한 화원을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와 꽃으로 꾸미고 해충이 들어오지 못하게 약을 치고 화원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나비와 꿀벌만 들였다. 화원 안은 단조롭고 심심해서 밖으로 나가 더 신나고 재미있는 것들 찾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밖은 위험했고 나는 위험에 처하고 싶지도, 상처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 낸 흠집 없는 인생이었다. 티 없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고, 결점을 낼 만한 것들은 차단했다. 그만큼 완벽하게 보존해 온 인생이었단 말이다. 부질없구나. 나를 완벽한 화원 안에 가두고 싶었는데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호기심은 날 화원에서 끌어냈으며, 그렇게 안전한 곳과 멀어지는 줄도 모르고 빠르게 걸어 나왔다. 완벽한 온도에서만 머물던 나는 밖의 무더위에 땀을 흘리고 매서운 바람에 흔들리며 세상이 주는 상처를 온전히 받아냈다. 호기심 그까짓 게 뭐라고 겁도 없이 나왔을까. 밖은 생각 이상으로 무섭고 험한 곳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내가 어디까지 나왔는지, 돌아가는 길이 어딘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작은 화원에 갇혀 살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지금 넓은 세상에 갇혀있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다시 화원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겠다. 그렇게 난 세상이 주는 상처를 온몸으로 받은 채 홀로 남겨졌다.


모든 것이 허상처럼 느껴진다. 나에겐 상흔이 남았는데 이것은 무엇의 흉터란 말인가. 당신에게 상처를 받은 것이 맞나? 아니. 이건 내가 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난 나 자신을 학대하고 있다. 그러니 이 상처는 타인이 냈다고 확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고장 난 남녀의 만남은 더 큰 장애를 가져온다. 그렇게 부식된 연애의 결말은 참혹하다. 그리고 지금 난 내가 내지도 않은 고장 때문에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남을 탓할 수도 나를 탓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게 자학이 아니고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난 밥도 먹지 못하고 웃지도 못하며 기쁘지도 않고 심지어 슬프지도 않다. 이런 감정 없는 껍데기만 남은 고장 난 나는 너희가 만들 결과물이다. 자! 보아라. 어떤가? 조금이라도 기쁜 마음이 드는가? 정말 잔혹한 사람이라면 내가 우습겠지.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너희 둘 중에 누굴 원망해야 할까? 원인? 아니면 결과? 이 글을 읽으며 느꼈으면 좋겠다. 본인의 잔혹함을. 난 희롱당했으며 농락당했다. 자신도 같은 피해자라는 감정이 드는가? 아니. 그건 아니지. 충분히 피해 갈 수 있었고 지나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과를 만들어야 했다면 그건 내 선택과 나의 결정이었어야 했다. 나는 그걸 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억울하고 속상하다.


난 지금 바닥이다. 흠집은 날 만큼 났고, 결점도 생길 만큼 생겼기에 난 이제 더 이상 안전한 화원 안에서만 머물던 순수한 아이가 아니게 되었다. 기억하는가? 당신 앞에서 실성하듯 웃던 나를. 나는 나를 가장 사랑했다. 나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었고 정직함과 상냥함은 날 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의 사랑의 결과가 고작 이것이라는 게 날 너무 비참하게 만든다. 고작, 고작 이거였나. 이런 사랑을 받고자 그렇게 노력한 것인가. 난 좋은 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진심의 대가는 너무 참담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고결함을 논하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사람의 사랑은 그리 고결하지 않다던 목소리가. 그럼 난 여태 무엇을 붙잡고 있었던 거지? 내가 보던 그건 대체 뭐였단 말인가. 맞다. 이래서 허상인 것이다. 다 거짓이다.


당신은 이 글을 읽을 것이다. 당신이든 누구든 읽을 것이라 확신한다. 왠지 그런 기분이 든다. 벌써 괜찮아졌나? 그러진 않았으면 좋겠다. 절망과 괴로움 속에서 조금 더 몸부림치길 바란다. 어디서부터 진실이었고 어디까지 거짓이었을까. 당신은 끝까지 거짓말을 했고 난 마지막 순간에도 거짓만을 말하던 당신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당신이란 사람,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왜 이렇게 망가졌니. 최소한 내가 아는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느낀 그 모습이 완전히 거짓말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당신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이제부터 다시 살아가면 된다. 그러니 행복해져라. 이건 단 하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다. 그리고 당신은 나를 위해 행복해져야 한다. 당신이 행복해져야만 내가 치유될 수 있다. 그러니 제발 그곳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행복을 찾아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아직 늦지 않았다. 고칠 수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다잡았으면 한다. 모두가. 모두가 다 그래야만 한다. 증오의 감정을 던졌지만 진정한 미움은 아니다. 알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단단한 사람이 못 된 다는 것을. 지금은 현실을 부정하고 가급적 마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나면 조만간 마주 볼 용기가 생길 것이다. 그럼 나도 천천히 치유되겠지. 참 후회가 길었다. 미련도 원망도 길었다. 이제 모두 잘라내야 한다. 그렇게 우린 다 괜찮아질 것이다.




난 요즘 바람이 휩쓸고 간 화원을 청소하는데 여념이 없다. 매일 쓸고 닦고 가꾸는데도 예전과 같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 이전의 완벽했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청소 중이다. 앞으로 나비와 꿀벌을 늘리고 예쁜 씨앗들을 더 심으면 예전과는 다르지만 또 다른 완벽한 화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화원 안에서만 머물 때 상상했던 바깥은 무섭지만 그 안에 막연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따뜻한 곳에 머물며 바라본 세상은 그러했다.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만큼 눈부신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난 그 세상을 사랑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사람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 "사람 너무 믿는 거 아니야."와 같은 조언을 많이 한다. 그 조언을 듣지 않았던 결말이 심히 아파 속상하지만, 난 앞으로도 예전처럼 보이는 걸 믿으면서 살아갈 것이다. 무서운 세상에서 뒹굴다 돌아와도 난 어쩔 수 없이 그런 사람인가 보다. 하지만 당분간은 화원 안에서 좋은 그림을 보고, 위로의 책을 읽고,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이 안온함을 즐겨야겠다. 그렇게 치유된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