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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쎄스 Dal Aug 18. 2018

마음 좋은 아저씨. 노회찬

늘 웃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그는. 마음 좋은 이웃집 아저씨 마냥 '허허허~' 낡은 구두와 소박한 차림에도 맑은 웃음 잃지 않던 마음 좋은 정치인. 그는 그렇게 따스한 잔상만 남긴 채 홀연히 떠났다.




#야속한 아저씨.


그날도 무더위 속에 잠을 설쳤다. 아이들 등교를 위해 잠을 깨야 하는데, 무거운 눈꺼풀이 영 말을 듣지 않는다. 영락없는 알람 소리. 그 소리에 반자동으로 몸을 일으키는데 그토록 무겁던 눈꺼풀이 떠지고 몽롱하던 정신이 깨워지게 만든건 다름 아닌 뉴스속보였다. 다양한 휴대폰 스팸문자 속 몇 개의 활자.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노회찬. 잘못 봤을 거라 도리질 쳐도 노회찬. 그는 00 오전 자신의 아파트 17층에서 투신을 했다고 한다.


침대를 부리나케 빠져나와 아직 잠이 덜 깬 남편을 일으켰다. "어떻게 해. 노회찬 의원이..." 남편 역시 놀란 눈치였다. 우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많이 힘드셨구나." 이 말 한마디만 남기고 TV를 틀었다. 방송채널들은 일제히 노 의원의 비보를 속보로 전하고 있었다. '맞는구나. 사실이구나. ' 인정할 수 없지만 나는 여느 날처럼 일상 속으로 들어갔다.


인정했음에도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예능 프로그램을 볼 수도 없거니와, 경쾌한 음악도 들을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연신 그의 지난 시간을 되내었다. 이런 정치인 없다고. 그동안 그를 진정한 정치인으로 인정하던 내 마음이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정의당의 열렬한 지지자도 아닌데. 그저 인간 노회찬을 높히 평가했던 탓일 거다.


그의 가는 길에 꽃 한 송이라도 놓아야 했다. 힘을 잃은 정의당에 작은 위로라도 전하고 싶었다. 그 마음 하나로 빈소를 찾았건만 그의 영정 사진 앞에 그만 꺼이꺼이 목놓아 울고 말았다. 위로는커녕 조문객을 맞던 정의당 의원들의 위로만 받고 돌아왔다. 그렇게 빈소를 찾은 인원은 나를 포함해 3만여 명을 넘어섰다고 했다. 각 지역 분향소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고 아파했다. 노회찬.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노회찬이 남긴 것들



-2004년 KBS <심야토론> 당시 한나라당, 민주당 거대 양당을 비판하며

"TV토론회 나와서 50년 동안 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꺼메집니다."


-2009년 MBC <백분토론> 당시

"3 급수에다 2 급수를 타면 그게 2 급수가 됩니까 조금 더 나은 3급 수지.
국민들은 1 급수를 원하고 있어요"

-최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중 자유 한국당의 공수처 설립 반대에 대한 논평 중


공수처, 자유 한국당이 엄청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사찰할 거라고, 정확한 얘기죠. 뭐.
아니, 동네에 파출소가 새로 생긴다고 그러니까 동네의 폭력배들,  
우범자들이 싫어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죠.
아니 뭐,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에프킬라 안 삽니까?

정치인 노회찬을 알게 된 건 사실 최근 몇 년의 기억이 전부다. 그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건 촌철살인으로 대표되는 특유의 화법. 그의 언어는 어려운 정치를 쉽게 풀어냈고, 국민은 그의 화법에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정치란 어려운 것. 그래서 관심 두지 않는 것. 암암리에 각인된 정치에 대한 선입견을 노회찬은 과감히 깨 고국 민 앞에 다가섰다. 어려운 정치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했으며, 권력이 닿지 않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기꺼이 다가갔다.


노회찬을 그리는 이들은 그를 특유의 화법으로만 기억하지는 않는다.

노회찬을 기리던 한 기자에 따르면, 노회찬 의원의 빈소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 20대 초반의 학생도 있었는데 그중 한 학생은 자신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전한다.

"고등학교 때 동아리에서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선뜻 승낙해주셨어요. 그 뒤로도 실제 연락을 했는데도 받아주시더라고요. 아직도 기억나는 게 제가 친구 생활 때문에 힘들어서 노원구까지 상담하러 간 적이 있어요. 그때 의원님이 다른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친구들 간 경쟁이 심해서 그럴 수 있으니 자신만의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해주셨어요, 그러면서 이건 선거법 위반 아니니까 받아도 된다면서 5만 원을 쥐어주셨어요, 그때 인간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고, 다른 정치인과는 다르다는 기억이 남았어요."


노회찬 의원의 이사를 맡은 적이 있다는 한 이사업체 직원 또한 평소 노 의원의 삶을 대변했다. 그동안 일반인은 물론 연예인의 이사도 많이 맡았다는 그는 노 의원처럼 소박하고 단출한 살림은 처음 봤다며 그의 짐은 책을 빼고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고, 그런 노회찬 의원의 죽음이 슬퍼 술 한잔으로 마음을 달랜다고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존경하는 분을 잃어 마음이 너무 아프다. 정치가 허망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 더 힘들고 가슴 아프다. (김경수 경남 도지사)


당과 정파를 넘어 수많은 국민들께 존경과 신뢰를 받아 온 정치인이었다. 우리 사회 가장 힘든 분들의 곁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켜 온 분이었다. (박원순 서울시장)
노 의원은 우리 한국의 진보 정치를 이끌면서 우리 정치에 폭을 넓히는데 큰 기여를 해왔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아주 삭막한 우리 정치판에서 또 말의 품격을 높이는 그런 면에서도 많은 역할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


나의 영원한 동지, 노회찬. 그가 홀로 길을 떠났습니다. 억장이 무너져 내린 하루가 그렇게 갔습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


노 의원이 해준 말 중 '말보다 글을 더 중시하고 글보다는 행동하는 사람을 중시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제가 노회찬 의원님을 따르고 형님으로 존경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성향이나 생각을 떠나서 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 초지일관 일생을 던져서였습니다. 형님, 이제 겨울에 뜨거운 굴국밥 누구랑 먹습니까?
형님 그리워요... (영화배우 박중훈의 추도사 중)

노회찬을 기리는 이들은 노동계 정치계 연예계 인사들을 비롯해 일면식이 없던 이부터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까지 다양했고 모두가 그가 남긴 것들로 슬퍼하고 아파했다.


노동을 뺄 수 없는 그의 정치 인생을 대변하듯 빈소 곳곳에는 '대한 항송 조종사 노동조합' '전국민 화학섬유노 동조합 연맹' 등 각 노동조합에서 보낸 조화도 줄을 이었는데  국회 청소노동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운구 행렬을 기다리던 모습은 그의 행적을 대변하는 대표적 모습이다.


노회찬 의원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국회 청소노동자들


진정 국민을 위하고 약자를 대변하던 정치인. 여전히 권위의식이 난무하는 정치판에 그의 가치관과 너른 마음이 그리운 이유다.




#정치인 노회찬.

노 의원이 정계에 입문한 건 90년대 초반 진보정당추진위원회의 대표를 역임하면서부터다. 이후 진보정치연합의 대표로 대선에 나선 권영길 후보를 지원했으며 국민승리 21과 민주노동당을 거쳐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공천을 받고 2004년 17대 총선에서 국회에 첫 입성을 했다.


노 의원은 촌철살인 화법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높여갔다. 하지만 그의 굴곡진 정치 인생은 애초부터 녹록지 않았다. 당내 갈등으로 민주노동당을 탈당했으며 진보신당 초기 공동 당대표를 역임했다. 이후 2010년에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진보신당 후보로 출마했는데, 당시 노 의원은 한명숙 민주당 후보와의 단일화를 거부하고 완주를 했으며 일부 진보권 지지자들은 그 이유로 한명숙 후보가 서울시장에 낙선했다며 노 의원의 선택을 비판했다. 이후 민주 노동당과의 합당을 추진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노 의원은 심상정, 조승수와 당을 탈당, 통합진보당 창당에 참여해 19대 총선에 (노원구 병 국회의원) 당선되면서 국회에 재입성했다.


하지만 2013년 2월 14일, 진보정의당 노회찬 공동대표는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만다. 19대 국회에 당당하게 입성한 노회찬 의원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게 된 건 (17대총선으로 입성한 이듬해 8월 공개한) 삼성 X파일 떡값 검사들의 실명 공개 때문, 대법원은 검찰 수사를 촉구한 노의원에게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형을 선고했다.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했다는 게 주된 이유다.


그리고 2016년, 노 의원은 20대 국회의원(창원 성산)으로 당선되는 동시에 정의당 원내대표로 선출 돼 사망 전까지 역임했다.


넘어져도 넘어뜨려도 노회찬은 일어났다. 어디선가 무릎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인상과 특유의 화법으로 약자의 편에 섰고 독보적 역할을 이어갔다.


그의 역할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건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하면서부터, 애청자들이 지어준 <노르가즘>에 출연하던 그는 역시나 통쾌한 화법으로 시사를 전하고 정치 흐름을 논했다. 정곡을 찌르던 그의 화법은 코너를 가장 인기 있는 베스트 코너로 올려놓았고 <노르가즘> 때문에 뉴스공장을 듣는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여전히 코너를 알리는 배경음악과 노회찬 의원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어려운 정치를 한마디로 정리하던 노회찬만의 언어가 그립다. 적어도 그가 옳다 말하던 세상이라면, 그래도 행복을 논할 만큼의 세상이 아닐까.

그의 가치관이 그의 성정이 그가 꿈꾸던 세상이.. 많은 정치인과 사람들로 인해 만들어지고 이어지길 바란다.


 

그곳에서는 부디 근심 걱정 내려놓고 평안하시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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