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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해랑 Dec 07. 2024

평화를 빕니다.

보통의 어떤 날을 위한 주문

It's drawn by Chet GPT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천주교 성당의 미사 중에는 "평화 예식"이라는 것이 있다. 신부님께서 위의 말씀을 하시면 주변에 있던 내가 아는 혹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 보고 웃으며 "평화를 빕니다."로 가볍게 인사를 한다.


'평화를 빈다.....' 20대 철이 덜든 시절 엄마 등살에 밀려 모태신앙이었던 교회에서 성당을 갔을 때는 같은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인데 이리 다를 수 있나 라는 생각과 미사 중에 평화를 비는 의식이 참으로 생경했다. 평화를 빌라니 무슨 전시 상황도 아니고 왜 여러 주제 중에 평화를 빌어야 하는 걸까?를 의문으로 담고 미사에 참여했었다.


그리고 세상살이에 찌들어 살아내기 시작하면서 그 '평화'가 매일매일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기 위해 아침부터 아이들과 등교 전쟁을 하고 그 후엔 각자 살아가는 일터 생활에서 여러 사람들과 평화로운 삶을 살아야 하고 해 가진 한가로운 저녁에는 평화로이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티브이를 보면서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잠들어야 하는 것. 우리는 하루 종일을 매일을 그리고 평생을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애쓰며 산다.


2024년 12월 3일 우리는 역사 교과서에서만 구경했던 "계엄 선포"로 일순간에 평화가 크게 흔들렸다. 나에게 12월 3일은 특별히 우리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날은 우리 엄마에게는 평생 "그걸 하지 말았어야 했어! "라는 자조 섞인 농담을 하게 했고, 어린 시절 나는 이 날에는 '엄마에게 아빠에게 선물을 사드려야 하는 생신과 비슷한 날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했던 일 년 중 기억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날은 내 평생 가장 무섭고 가장 혼란스러운 어두운 날의 하나로 기억이 되겠다.

정치적인 내용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소시민이고 그걸 내 글에 담을 용기도 없거니와 모두를 설득시킬 전문적인 지식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지키고 싶은 내 가정의 평화와 내 아이들이 눈에 어린 두려움이 가슴 아프게 기억되는 날이기에 기록을 남겨 두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지 싶다.


It's drawn by Chet GPT


"여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대! 이게 뭐야?" 

그 시간 우리 집은 학원 숙제를 두고 거실 식탁에서 나와 아들을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딸은 소파에 앉은 아빠 옆에서 아빠랑 숏츠를 보면 둘만의 정신적 유대를 만들고 있는 아주 평범하고 평화로운 하루의 끝무렵이었다. 빨리 마무리하고 내일 학교 가야지에 열을 올리고 있는 그 순간. 


학교 역사 시간에 '계엄'이라는 단어를 들었던 6학년 아들은 "엄마 그거 군사 독재"아니야? 라며 알은척을 했고 나는 그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가는 경험을 했다. 많진 않지만 단체로 묶여있는 카카오톡의 대화방은 이 일로 설왕설래 중이었고 내일부터 무엇을 못한다 차단된다 하는 이야기, 국회에 무장한 군인들이 들어간다는 이야기, 시민들이 그들을 막아섰다는 이야기, 국회 담을 넘는 국회의원들의 이야기, 아직 다 막히지 않은 인터넷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3년여의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의 시간을 겪고 이제 좀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우리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일상을 평화롭게 영위하기 위해 누군가는 명상을 누군가는 운동을 누군가는 독서를 권한다. 그러나 이런 불가항력인 상황에 어떤 마음으로 어떤 기도를 올려야 할까? 자연재해에는 대응할 매뉴얼이라도 있다지만 이런 상황엔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이런 생각들로 잠 못 드는 새벽을 보냈다. 다행히 모두의 불안과 걱정이 하늘에 닿아 계엄선포는 계엄해제로 이어졌지만 그 몇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지옥을 맛보게 했다.


날이 밝고 아이의 학교에서 정상 등교를 한다는 메시지에 아이는 실망했지만, 엄마는 이번에는 또 닥쳐올 어떤 비평화적인 내용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해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오늘의 태양은 어제의 태양과 별반 다를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보통의 어떤 날이 아주 소중 하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과 내 안의 평화를 더 감사히 누려야 한다는 것을 새삼 또 깨닫는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잠시 흔들렸던 평화가 문제였을까? 안 그래도 운전 꿈나무에서 운전 어린이로 5개월 차를 살아가는 중인데 양옆으로 불법주차해 둔 차 사이를 지나다가 내 차 오른쪽 미러로 다른 차 미러를 뒤로 넘겼다. 새벽의 혼비백산 못지않은 심장이 떨어지는 다음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내려보라는 차주님의 말에 "아니 아저씨 여기 주차하는데 아닌데 다니는 길에 이렇게 주차를 하면 어떻게 하냐..."며 바들바들 떨며 중얼거리는 나의 목소리만 다 내리지도 못한 창문으로 새어 나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결혼 후 냉담의 생활을 보내고 있는 내게 주님이 많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하루를 다시 보내고 싶다고 아주 보통의 하루를 다시 돌려 달라고 엉엉 울며 매달리고 싶은 그런 날을 보냈다. 그리고 내 눈앞으로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넨다.


평화를 빕니다.


It's drawn by Chet 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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