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 원장님? 아 맞다 내가 원장이지.....
“따라라 따 따단~” “네~ 학원입니다~!!” 뉴진스의 버블검 전주를 뒤로 하고 양치를 하거나, 내 아이들에게 으름장을 놓거나, 남편과 살벌하게 기싸움을 하더라도 언제나 상냥하고 신뢰 있는 톤으로 전화를 받아야 하는 나는 학원 원장님이다.
눈을 뜨면 아들은 학교 가기 싫다고, 엄마는 학원 가기 싫다고 하며 시작하는 우리 집의 우스꽝스러운 아침. 일을 이렇게 까지 키울 생각은 아니였는데…. 현재 나의 직업은 00학원 원장님이다.
교육열 높은 대한민국의 어머니가 되고 신혼여행 다음 날부터 시부모님과 한집에 사는 나로서는 출근할 곳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 종일 집밖에서 떠돌이를 해서라도 퇴근이라는 절차가 필요했다. 학원을 열기까지 단 하루의 공백도 없이 이직을 해내는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내며 급기야 자영업까지 도전하게 만들었다. 시어머니는 나의 커리어 제조기가 아니실지.
학부에서의 전공은 법학이었다. 사실 대단한 청운의 꿈을 안고 선택 했다기 보다는 수능을 보고 말 잘 듣는 세자매 맏딸이라는 포지션은 아빠가 정해주신대로 두말 않고 원서 넣기. 그리고 붙은 곳이 법학과였다. 여느 드라마에서 묘사 되듯 눈이 뺑뺑 돌아가는 뿔테 안경을 쓰고 고시 합격까지 은둔의 생활을 해야할 것 같은 그런 전공학과.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신나게 놀아 보지도 못하는 20대를 보낸 후 법률사무실에 입사했다.
‘나는 진짜 법 없어도 살 사람인데...’라는 성선설을 매일 가슴에 새기며 또 시간을 보내다 나랑 비슷한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결혼해 보니 이 집에 나만 빼고 다 정년이 보장된 직업군이었다. 분위기도 그렇거니와 시어머니랑 매일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지속가능한 일거리를 찾아 매순간 순간이 나를 찾는 과정이었다. 30이 넘은 나이에 나를 찾는 일은 수능 점수대로 대학 원서를 쓰던 그때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 발견한 독서지도사! 어린 시절 많이 읽고 또 읽고 쓰는 일에는 흥미가 있던 터라 독서․논술을 가르치는 방문교사 시험에 합격 했고 나름 입소문 좋은 시절을 보냈다.
중도 제 머리는 못 깎는다 했다.
나름 유명세를 떨쳐가며 잘 나가는 강사인 나는 사실 정작 방치된 내 아이들의 엄마였던 거다. 학원에 찾아온 엄마들이 가장 자주 넘겨짚던 질문은 ‘선생님 아이들을 다 하죠?’라는 부러움이었지만 당사자인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종일 밖을 돌아치다 간신히 귀가해보면 어느 덧 밤 10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감정 하나 없이 한결 같이 친절하고 다정한 말투로 했던 설명을 또 하고 또 해도 또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시간까지 숙제 한쪽 안해 놓고 있던 내 아이들에게는 한 마디를 해도 곱게 나가질 않았다. 숙제를 바라는건 욕심이었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엄마를 기다리다 씻지도 못하고 잠든 병 걸린 병아리들이었다. 이 생활을 중단할 때가 왔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어.
일과 사랑 말고 일과 교육을 다 잡아보고 싶었다. “여보 나 학원 차릴까봐!” 유난히 타고난 눈이 처져 안검하수가 절실한 우리 남편. 그 축처진 눈꼬리가 이마 끝까지 올라갈 정도면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언제나 부인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라는 남편이었다. 언제나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었기에 교육사업가가 된다고 하니 나름 계산이 나왔는지 몸이 부서지게 도와주었다. 그에 힘입어 2022년 7월 학원을 개원했다.
내가 견학간 동종업계 학원들은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갖추고 출입구 바로 앞에 교육보조 선생님들이 환한 미소로 맞아주시는 그런 곳이었다. 나의 학원도 그러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나의 주머니 사정상 나의 학원에는 안내 데스크와 보조 선생님은 없었다.
다행스럽게 학교 앞에 주택이었지만 용도변경이 가능한 나름 널찍한 공간을 구했다. 고르고 골라 시설을 갖추고 온화하고 고급진 미소를 탑재하려 애써 보았다. ‘뚱땡이 원장님’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급히 5kg도 빼보았다. 우아한 원장님이 되고 싶어 무더위에 머리도 한번 묶지 못하고 원피스만 입고 한여름을 보냈다. 계단 올라오는 발소리 학원문 열리는 딸랑 소리에 기립하는 매일 매일이 이어졌다.
주변에 “학원을 개원했습니다.” 라고 말하면 축하인사와 함께 오는 반응이 ‘용기가 가상하다.’였다. 이것이 그렇게 용기가 가상까지 할 일인가? 아마도 그때의 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했다는 기쁨에 한껏 들떠 있어 다가올 엄청난 것들은 아마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문 열면 우르르 아이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였으나 당장 월세, 전기세, 기타등등 살짝은 무모했던 내 용기의 가상함을 되짚어 생각하게 하는 자영업자의 심장 쫄깃한 하루하루는 흘러 갔다.
사교육이 과열 되었다. 우리나라는 사교육에 너무 몰입하여 나중에 나몰라라 하는 자식들 때문에 박스 줍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어차피 콩콩 팥팥이라 아이들 역량은 정해져 있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들은 100% 정답도 오답도 아니다. 그렇지만 과거제가 시작된 고려부터 대리시험과 쪽집게 과외가 성행했던 조선시대까지 우리의 사교육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만 나도 교육비내고 학원을 보내는 엄마이고 또한 교육을 맡고 있는 사교육자이니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어 가는 것이 사교육에 과열된 대한민국에 보탬이 되는 원장님의 역할이리라.
고무장갑을 끼고 앞치마 두르고 화장실 청소에 한창 일 때 “여기 원장님 어디 가셨나요?” 하고 원장님을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다급해진 마음에 헝클어진 머리로 바닥솔과 분무 청소세제를 들고 “누구요? 원장님??? 아 제가 원장인데요~!!” 그렇게 의욕 가득한 병아리 원장은 본인확인 후 하루를 시작한다.
이 글을 빌어 교육 사업한다는 부인을 위해 밤낮없이 무료 봉사해준 남편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여보, 미안하지만 남편상호신용금고에서 빌린 대출금은 당장은 갚지 못할 것 같아. 그래도 기다려 준다면 복이 올 거야. 제네시스 받을 날이 올꺼라는 믿음으로 차분히 기다려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