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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윈타 Dec 19. 2021

시간을 조각내어 살기

아이가 잠든 새벽, 곤히 잠든 아이를 바라본다. 

다 내려놓고 아이 옆에 누워있고 싶다. 쌕쌕 거리는 숨소리, 따끈한 발, 숨쉬면서 오물거리는 입술, 가느다란 손가락, 붙어있는 작은 손톱에 남긴 크레파스의 흔적, 목덜미에서 풍기는 아기 냄세. 조용히 아이 손가락을 잡으면 슬쩍 감기는 손가락이 보들보들 하다. 이 감각을 오랫 동안 느꼈으면 좋겠다. 


하지만 자고 있는 아이를 슬쩍 빠져나와서 책상에 앉는다. 

새벽 5시 30분. 지금부터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오늘 하루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생각해보고 일의 양을 가늠해본다. 새벽이라 조용한 골목에 어둑해진 공기가 조용하다. 부산해지기 직전에 모두가 조용한 이 시간이 고요해서 좋다. 


아이의 손을 잡고 누워있으면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지만

정작 아이 곁을 빠져나와 혼자 있는 시간에 만족을 느낀다. 

엄마는 네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단다, 말하기엔 좀 서운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하지만 혼자 맞는 새벽과 고요한 시간들이 늘 내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아픈 날은 일상이 비상이 된다.

아이가 큰 병에 걸린것도 아니지만, 약간의 호들갑을 떠는 상태가 딱 내 상태가 되어버린다. 

아이가 2살때 멀쩡히 잘 서있다가 앞으로 살짝 기울어졌는데, 별것도 아닌 상태에서 확 고꾸라졌다.

그대로 이마와 입술을 바닥에 부딪혔고 아랫입술을 이빨로 깨물어 피가 흘렀다.


입술 주변의 조직들이 워낙에 연하고, 얇아서 가벼운 상처에도 피가 많이 난다는 건 

나의 경험으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입술에서 굵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이빨 사이에 흥건한 빨간 피를 보니 가슴이 뛰고 두근거렸다.


처음엔 피를 멈춰보겠다고 자지러지는 아이를 붙잡고

입안에 솜뭉치를 넣어 우는 아이 입슬을 틀어막았는데, 어디가 찢어진건지 보이지도 않는데다가

아이가 발버둥 치는 탓에 지혈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비명을 토해내듯 우는 아이를 데리고 운전을 할 자신도 없었고, 

혹시라도 이제 겨우 얼굴을 내민 작은 이빨이라도 흔들리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1분이 10분같았던 시간들

그 작은 아이를 카시트에 앉혀서 제대로 운전할 여유가 없어서 119에 전화를 하고 응급실에 갔다.

대학병원에 도착하고 나서 의사가운을 입은 선생님들을 보자 흥분한 마음은 가라앉았지만

우는 아이를 안고 곁에서 무력하게 앉아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게 없다는 게 고통스러웠다. 


다행이 의사의 진단과 처방은 내가 생각한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이빨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아랫 입술이 크게 찢어져서 엑스레이로 한번 더 찍어보고

꼬매기에는 애매하니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고 하셨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아이를 끌어안고 엑스레이 실 앞에 앉아서 

그제서야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하며 설명을 하는 동안 혼자 느꼈던 무력함과 고통이 느껴져서 

눈물이 펑펑났다.  그리고 이삼일이 지나고 나서 아이의 입술은 자연스럽게 붙었고 밥과 물 먹는 시간동안 따갑고 아픈 탓에 고생하는 것 말고는 컨디션도 돌아왔다. 


며칠 밤낮으로 고생하며 수척해진 나와, 그런 나를 돌보는 남편은 피로감을 느꼈지만 

아이의 컨디션이 좋은 탓에 안심했다. 


우리는 영락없는 초보 부모였다. 

아이의 컨디션은 좋아졌지만 놀랐던 아이를 더 웃게 해주려고 남편과 나는 아이를 끊임없이 살피고 웃게 하려고 노렸했다. 앞으로도 이런 일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찾아오고 그 때마다 다른 감정으로 흥분하고 놀라겠지만,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긴장감도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아이가 돌이 지나면 육아와 관련된 모든 일들도 능숙해 지겠지 싶었다. 

부모의 삶과 나의 삶이 구분지어지면서 양립가능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겠지.

아이가 세살, 네살이 되면 평일의 밤과 주말의 밤에도 나만의 시간을 활용하며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부모라는 이름으로 맞닿는 순간은 모두 처음일 뿐이다. 

둘째 아이가 없어서 더 그렇다.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들로 지나갈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의 균형을 어떻게 이뤄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오늘은 눈이 내렸고, 따듯한 이불을 덮고 무척이나 읽고 싶었던 책을 곁에 두고 하루종일 침대위에서 책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보고 나가자며 폴짝폴짝 뛰는 아이를 집에 두고 활자를 읽어내려간다는게 집중이 될 리가 없다. 


결국에는 아이 손을 잡고 장갑을 끼고, 모자를 썼다. 

작은 오리와 공룡을 만들어 내는 틀을 가지고 아이 손을 잡고 나갔다. 

웃으며 좋아하는 아이를 보며 함께 달리기를 하고, 괴물 잡기 놀이를 하고 눈싸움도 했다.

스케이트 탄다는 아이를 위해 썰매를 밀듯이 손을 잡고 끌었더니 허리가 당긴다. 


아이가 클수록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며

여유로운 시간들의 열린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내 삶은 아이를 향해 있고, 아무리 균형점을 잡으려고 해도 아이 쪽으로 기울어진다. 

시간을 조각내서 잘 활용하는 것만이 내가 좀 더 노하우를 쌓을 수 있는 방법이다. 

이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걸 알면서도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건 숙제로 받아들여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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