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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 Mar 28. 2022

마음에 탈이 나고 나서야 힘이 났다.

영화 [리틀포레스트]

극장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난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때까지

“나도 해답을 찾으러 내려갈려”라며 엉엉 울었다. (같이 간 언니가 매우 창피해했었다.)


난 인구수 8만명 남짓인 작은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롯데리아의 유무에 따라 시내가 정해졌고,

가게가 하나 생기면 가게 이름보다 '누구네 집', '누구 고모가 하는 곳'이란 말이 더 익숙했던 그런 동네.

뭔가를 이뤄보겠다며 그곳을 떠나 온지도 10여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난 해답을 찾지 못한채 낯선 서울을 배회하고 있다.

이 영화는 그 이후 종종 떠올랐다.

저녁 10시 편의점 도시락이 그날 하루 첫끼일 때, 혼자 마시는 맥주가 싫어질 때, 

이불까지 두르고 있어도 방이 춥다 느껴질 때..

하지만 떠오르는 것과 별개로 영화를 다시 꺼내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때 울던 내가 어떤마음이었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내려가지도 그렇다고 남겠다는 결정도 못한 애매한 내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영화를 다시 꺼내본 건 아이러니하게도 한달의 백수 생활이 이어지고 있는 날들 가운데

일주일의 여행을 끝내고 올라가는 서울행 기차 안에서였다.

어쩌면 백수 생활의 끝이 서울이 아니 다시 고향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왠지 영화를 보고 나면 다시 내려갈 명분이 충분 할 것만 같았다.

영화가 끝이 나고 눈물이 터질까 미리 준비했던 휴지는 무색할만큼 그 자리 그대로 놓여있었고

서울에서 좀 더 버텨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올라와 8년이란 시간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었다.

처음 90만원을 받으면(3.3퍼센트 세금을 떼고 나면 870,300원이다.) 

그중 44만원은 고시원비, 그 외 휴대폰 요금이다, 적금이다 다 빠져나가고, 

난 주말에도 알바를 해야 그나마 친구를 만나 커피 한잔을 할 수 있는 나에게 서울은 그런 곳이었다.

물론 지금은 친구에게 커피와 밥을 살 정도가 되었지만 이젠 시간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지난 10개월은 쉬었던 날을 세어보면 채 열흘도 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일을 좋아했고 그만큼 열심히 했지만 서울은 여전히 가혹했다.

여러 파트의 업무경험은 열정보다 ‘싫증’이라 평가 되어졌고, 

솔직함은 커뮤니케이션 능력 저하로 판단되어졌다.

그 시선들을 피해 집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집도 해답이 되지 못하자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전라도로 충청도로 경상도로.. 발 닿은 곳 그렇게


“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떠나왔다.”


빠르게 밥을 먹고, 걸음은 빨라야 하며, 시간을 허투루 써서는 안되는 치열했던 생활들이 익숙해져서였는지

난 여행에서도 다급했고 조급했고 버거웠다.

하루 2500걸음 이상을 걸어야 만족했고, 일찍 일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꼭 새벽 3시즈음 깼다.


"그렇게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 돼?"


‘온전히 충전해야해, 여행을 통해 느낀게 많아야해’란 생각들은 압박이 되었고 결국 몸살로 앓아눕게 되었다.

그날 해내야 했던 스케줄을 다 취소하고 

숙소 1층에 있던 북카페에서 하루종일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영화를 보며...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쉴 수 있었다.


지쳤을땐 잠시 쉬어가는 것은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래 그 길을 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쉬어가는 방법을 몰랐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란 뻔한 말들은 사실 마음을 온전히 단단히 채워주지 못했다.

버텨내는 법만 배우느라 쉬어가는 방법이 어려웠던 탈난 마음은 결국 몸살로 드러냈고 

그제서야 '어쩔수 없이' 쉴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본 ‘리틀포레스트’가 아닌 그날의 ‘몸살’이 서울을 다시 한 번 버텨낼 용기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버텨낼 용기와는 무색하게 청량리역이란 글자를 보자마자 숨이 막혀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섣부른 용기는 어쩌면 다시 나만의 리틀포레스트를 갈망하지만 

다시 꺼내볼 여력 없는 경주말을 만들어내질도 모른다.

아니면 결국 난 해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쉬는 방법도 해답도 모르는 내가 종종 아프기라도 했음 좋겠다.

그렇게 자주 돌아보고 들여다보면 나만의 작은 숲으로 가는 이정표정돈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겨울을 견뎌낸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배나 달고 단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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