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기록하는 것일까, 기억하는 것일까?
휴지통에 있는 항목들을 영구적으로 지우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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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이집트, 포르투갈을 여행하며 찍었던 5,000여 장의 사진이 허공으로 사라진 건 한순간이었다. 귀신에 홀린 듯 '휴지통 비우기'를 클릭했다. 1분 뒤, 싸한 느낌이 들었다. 바탕화면에 있어야 할 '여행 사진첩' 폴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여기저기를 다 뒤져봤으나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실수로 여행 사진첩 폴더를 휴지통에 넣고, 그 휴지통을 바로 비웠던 거다. 대략 난감이었다. 그나마 SNS에 올리기 위해 핸드폰에 저장해두었던 몇 십장의 사진이 남아있던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무거운 DSLR을 들고 여행한다는 건 참 고된 일이다. 요즘에는 폰카 성능도 좋아지고, 가벼운 미러리스에 액션캠까지 등장해 DSLR을 들고 다니는 여행자가 드물다. 하지만 홀로 여행하면서 가지는 유일한 낙이 사진을 찍는 일이기에 DSLR을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사진도 관리하고, 이래저래 핸드폰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있기에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일도 포기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가 늘어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컴퓨터에 보관해야 하는 사진의 장수가 늘어나면서 저장 용량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불필요한 파일을 정리하고, 휴지통을 바로바로 비우는 습관이 생겼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여기서부터였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당장 파일 복원 업체에 노트북을 들고 갔겠지만,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현실 인식이 안 되었다. 이미 사라진 사진인데 어쩌겠냐는 생각이 들었고, 깔끔하게 노트북을 닫고 잠을 잤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사라진 사진만큼의 여행시간이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어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무거운 DSLR을 들고 여행하면서, 사진 찍는 일에 골몰했던 내 자신이 서글프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와중에 이건 정말 잘 찍었다고 생각했던 사진들이 하나 둘씩 머리속에 떠오르면서, 조금씩 마음이 추스려졌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사진에 '기록'하는 일에만 열중했지, 마음에 '기억'하는 일은 소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기억에 남는 사진 하나 하나를 떠올리며 쉬이 잊지 않도록 마음에 잘 담아두기로 했다.
기록은 기억보다 더 강력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순간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했고, 기록(혹은 추억)이 될만한 것들을 버리는 일은 끔찍이도 싫어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여행하는 동안의 기억조차 사진에 기록된 프레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록은 정말로 기억보다 강력한 걸까? 누군가 자신이 만났던 희한한 여행자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그 여행자는 여행하면서 사진을 절대 찍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자신이 여행지에서 느낀 느낌의 기억으로만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뒤 내 기록과 그의 기억 중 어떤 게 더 강력한 여행의 결과물로 남게 될까?
포르투갈을 떠나 모로코로 왔고, 나는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여행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힘들기도 하고, 외로움에 사무치기도 하고, 가끔은 낯선 곳에 있다는 사실이 무섭기도 하며, 여행 이후의 일상이 걱정돼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가끔은 함께 동행한 다른 여행자들에게 불편을 끼치거나, 다퉈서 불쾌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행 사진에 그런 것들은 기록되지 않는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는 아름다운 사진을 통해 여행을 좋은 추억으로만 기억하려는 잘못된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사람들은 아마 내게 여행을 해서 달라진게 무엇이냐, 혹은 여행을 통해서 배운게 뭐냐고 물어볼 것 같다. 뭐라 답할 수 있을까? 기록하기에 여념이 없던 시간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좋고, 힘들고, 나쁘고, 불쾌하고, 반성하고, 깨닫았던 모든 기억에서만 답이 나와야 할 것 같다.
기록하기 위한 여행을 할 것인가? 아니면 기억을 위한 여행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