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3화 _ 새벽의 수다쟁이들 ]
“피곤할 텐데 어인 일로 뻐꾸기 창구로 다시 호출해 주셨습니까? 해인양?”
함께 일하게 된 레스토랑과 귀가길, 데이트...
사실상 종일을 같이 있을 수 있었지만,
집 창문 너머로 얼굴을 내밀어 만나는 것은 꽤나 오래간만인 두 사람.
“헤헷, 전엔 이러고 자주 수다 떨고 그랬는데...!”
“왜? 그 때가 갑자기 그리워서? 음... 직접 더 가까이에서 수다 떨고 할 수 있게 됐는데 뭐가 그리웠을까...? 내가 거기로 점프라도 할까?”
“됐거든!! 전할 말 있는데, 잠깐 괜찮나 해서...”
“전할 말? 그럼...여기서 이러고 말하기도 뭐한데 잠깐 산책하실까요? 해인양?”
“음...얼굴 보이긴 하지만, 전화로 할 말이 아니긴 하고... 그럼 지금 괜찮아? 혹시 작업 중이면...”
“사랑스런 우리 해인이가 부르는데 언젠 안 괜찮을까...! 한... 10분? 뒤에 집 앞에서 봅시다...!”
레스토랑에서 돌아와서도 계속되는 퇴고 작업에 세현 역시도 잠시 기분전환이 필요하다 여기던 차였다.
밤 12시가 넘은 새벽.
해인은 최근부터 모시게 된 멋진 그림 과외 선생님과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레스토랑의 일까지 병행해 피로가 쌓인 탓인 지, 전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 다른 때 같았으면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자, 그럼 갑시다. 해인씨! 그나저나 꼭두새벽에 무슨 일이실까...!"
해인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세현의 팔을 꼭 붙잡고 바짝 옆에 붙어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퇴근길의 풍경과는 또 다른, 사방 건물들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여있고, 그저 걷는 방향 쪽으로 죽 늘어선 가로등 만이 드문드문 앞길을 비추고 있었다.
공원까지 쭉 이어진 울퉁불퉁한 암석 재질의 바닥은,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소소하게 반짝이는 꽃길을 연출해주고 있는 듯 했다.
이제는 외울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아를의 밤거리.
그렇지만 언제보아도 질리지 않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풍경이었다.
암전이 된 무대의 저 끝에서 핀 조명을 받으며 등장하는 연극의 주인공들처럼, 새벽의 아를 산책은 자연스럽게 그들만의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임씨, 아직... 다 본 게 아니라 말 꺼내기가 좀 조심스럽긴 한데...”
“응? 뭘?”
“임씨 소설 말이야...! 사장님 말 듣고 나 요즘 그것만 보고 있잖아, 그림도 못 그리면서...”
“아... 그렇지, 어때? 음... 볼만하니?”
아무렇지 않은 척 너스레를 연기하는 세현의 표정에서, 공개한 소설의 첫 번째 감상을 듣는 초조함이 전달되어졌다.
“얘기가 너무... 뭐랄까...그...”
“너무...?! 너무..."
세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잠시 뜸을 들이던 해인. 세현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인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내가 말로 표현을 잘 못해서 미안할 정도로 재미있어...!! 지금도 할 말 있다고 내가 부르긴 했지만 나오기 싫을 정도로 빠져있었는데...”
“아...그래...?! 다행이다...!!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과 함께 지어진 환한 세현의 미소.
세현을 잠시 놀려먹으려 했던 해인 역시 너무나도 천진난만한 세현의 표정변화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후훗, 아직... 뭐 절반도 못 보긴 했지만... 사장님이 소설 첫번째 볼 때는 그냥 이야기만 따라가라 하셨었거든...!
근데 이렇게 정성들여 한땀 한땀 만들어낸 소설에 내가 그림으로 잘 서포트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잡생각이 더 많이 들어...”
세현은 인상까지 쓰며 중얼대는 해인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강하게 잡아 채며 머리를 장난같이 마구 쓰다듬었다.
“아이구...!! 그게 그림 의뢰한 작가한테 할 소립니까?! 프로의식이 있어야지!! 실컷 좀 허세를 부려봐!!
[ 내 그림이 붙여지면 이 소설은 아마 어마어마하게 가치가 올라갈 겁니다! ]
정도의 뻥은 올려쳐줘야 아, 이 화가, 믿을 만 하구나! 그러지...!”
“흥, 그럼 그런 뻥쟁이랑 작업하시던가!! 솔직한 게 뭐 나쁘냐!! 그리고 내가 무슨 프로냐?!"
“허...! 이 분, 세상 물정을 모르시네...! 내 여친이라 봐준다...! 다른 데 가선 그러지 마! 내 그림이 짱이야!! 라고 얘기해야 사람들이 찾아주지, 이럴 때 겸손은 경쟁력 상실이야!!"
“쳇...!! 그래서 내가 다른 델 갈 수가 없네요...!"
다정하게 꼭 붙어 광장 근처까지 걸어 온 두 사람.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이거늘,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다보니 금새 이곳까지 닿았다.
슬슬 원래 하려던 이야기를 꺼내려는 지, 해인은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 세현에게 물었다.
“임씨... 있잖아... 그 아영이한테 부탁했던 거 말인데, 조금 전에 아영이한테 답장 왔어...”
“엥? 그래? 한다던 얘기가 그거 였구나...! 아영이 뭐래?! 좀 위험하기도 했을 텐데...!"
“음...전화로 얘기한 건 아니라 자세하게 물어보진 못했는데, 아무튼 그 기태라는 사람한테 임씨 메일 내용 전달 잘 했다더라고.”
“후훗, 참 아영이도 성격 여전하네...! 이렇게 빠를 수가 있나... 전한 지 이제 얼마나 됐다고... 참, 해인이도 나 대신 그거 아영이한테 부탁해주느라 수고했어...!”
“내가 뭘 했다고...”
한기태라는 사람과의 해프닝.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세현만큼 감정이 상할 문제는 아니라 해도, 해인은 여전히 뭔가 불편함이 남아있었다.
세현과 이곳에서 만나 사귀기 시작하기 전부터도, 정기적이라 생각할 정도로 자주 들었던 친구 기태의 이야기.
당연히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임에도,
자신의 남자친구, 세현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는 그 사람은 왜인지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그렇게 믿고, 의지하기까지 했다던 사람이 반대로 자신의 친구를 코너로 몰아넣었다고 하는 사실에
어쩌면 세현보다도 더한 분노를 느껴, 반드시 따져 물어야 함을 강조했었던 해인이었다.
기태에게 연락을 망설이던 세현에게 바로 전화를 종용했던 것 역시도 해인 쪽이었다.
‘할 얘기 있으면 다 해! 절대로 용서하지 마! 그런 자식은 용서하면 안 돼!! 벌 받아 마땅해!'
전화를 하라고 자리를 비켜주며 해인은 이 말까지도 세현에게 해주고 싶었었다.
더 세게, 강한 투로...!
그렇지만 깊은 시름에 잠긴 세현의 얼굴을 보고 차마 그 말 까지는 하지 못한 채...
그저 옆에서 지켜봐주기로 했었지만.
이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상처받을 세현을 위로하고 다독여 주는 일 뿐이라 생각했다.
분명히 기태에게 전화를 할 때는 고성이 오가며 크게 싸우는 분위기였고, 그 과정에서 뭔가 복수의 감정까지도 가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겨우 이 정도 마무리라니...
해인은 세현이 궁금했다.
사건 이후 고통 받는 모습도 옆에서 지켜보았었고,
지금, 그 고통의 시작이었던 범인이 밝혀졌는데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인건지...
“임씨...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뭔데? 목소리 쫙 깔고 물어보니까 무섭잖아... 나 무서우면 대답 안할거야..."
“쳇…! 그런 거 아니고...”
세현은 이미 질문 내용을 알고 있기라도 한듯 해인에게 평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 그냥 이렇게 끝내려고 하는 거야? 아무리 친구라도, 그 사람 때문에 억울하게 누명 쓸 뻔한 거잖아. 마음 고생도 엄청 해놓고는... 괘씸하지도 않아?”
“음...”
세현은 해인의 질문에,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 서서히 입을 열었다.
“화가 나고, 배신감 느끼고, 복수...까지도 생각했었어...근데...”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이제까지 그 녀석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었고...”
“어떻게... 생각했었다는데...?”
해인은 세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릴 적부터 친하다고 생각했던 그 녀석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날 쳐다보는 시선하고 비슷하달까... 고깝고, 불공평하고, 한편으로는 꼴 보기도 싫었을 지 몰라... [잘 나가는 아버지 밑에서...] 이래가면서..."
“이 정도로 일 벌일 정도면 그랬을 지도 모르지만... 근데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그래도 된다는 거야?! 왜 당해놓고 아무것도 안 해? 임씨는?”
“아무것도 안한 거 아닌데?”
“응? 뭐 했어, 그럼?”
세현은 입술을 굳게 닫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뜸을 들이다 이야기 했다.
“친구 하나 버렸잖아. 그래도 나름 어릴 적 친구라고 얘기 할 수 있는 사람, 그 놈밖에 없었는데..."
“버려? 친구로서 그 사람을 버렸다는 거야? 그게... 다야? 그 사람은 애초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했던 행동 일 거 아냐, 그럼 당한 임씨는 결국 아무것도 안한 거나 다름없는 거고...”
“왜 아니겠어? 억울하고, 괴로웠고, 성질났어... 잘못한 것도 없는데...하면서 한탄도 엄청 많이 했잖아... 출판사가 입은 피해는 뭐 말할 것도 없지..."
“그런데?”
“이 상황에서, 내가 기태를 어떻게 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지가 않아. 사실이 아니란 거 밝히느라 이제까지 노력했고, 이제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니까...
이제 와서 ‘사실은 누가 퍼뜨린 헛소문입니다’ 라고 얘기 하는 건 어느 쪽에도 득이 될 것 같지도 않고...”
해인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세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버지 때문에 옛날부터 많이 겪어왔단 말이야. 어떤 이유건, 좋지 않은 이미지가 찍히고 나면 그 이미지가 생긴 원인을 밝혀내는 것보다... 하루 빨리 다음을 만들어 내는 게 이미지 쇄신에 더 좋은 거라고. 적어도 대중들에겐 말야...”
“한번 안 좋아진 이미지는, 달라지는 모습보이기 전에는 원래만큼 돌아올 수 없다...이건가.”
“그래, 계속해서 좋지않은 이미지가 남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앞으로 내가 더 인정을 받아야 만 하는 의무...라고 생각해.”
“음... 음? 인정을 받아? 누구한테...?"
“뭐가 [음...] 이야!! 그러니까, 해인이가 도와줘야 된다고!!”
"내...내가...? 뭘 어떻게...?!"
세현은 따지듯 물어대다가 어리둥절해 하는 해인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자, 나도 아직 계속 고치고는 있지만, 이제 해인이 차례니까...! 이 손으로!! 앞으로 끝장나는 일러스트를 그려줘...!! 소설 띄워서 출판사 명예를 찾아주자고...!!"
"엑!?"
"다음이야...! 우리 다음 작품으로, 이 상황 이겨내면 되는 거야!! 자신 있지?!"
"아... 그..."
언제부터 이런 당찬 생각을 해왔던 건 지, 세현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얘기하는 모습이었다.
세현의 얘기에 동화가 되어서 인지, 해인은 커져가는 부담에 서서히 몸이 떨려왔다.
"해인이한테도 이건 공식적인 프로 데뷔야...! 공모전 수상 덕에 출판 기회 한 번 얻긴 했어도 잘하지 못하면 처음에 나온 의혹이 더 가중될 수도 있는 거니까..."
갑자기 일러스트레이터 로서의 의무감을 주입하는 세현에 당황했지만, 해인은 다시 세현에게 물었다.
"그럼, 그 기태라는 친구한테는 그냥 이대로 '너대로 살아라'가 끝인 거야? 하던 거 계속 하라고 하면서?"
"뭐...해인이 너도 봤겠지만, 메일에 썼던 내용이 내 진심이야...! 이젠 뭐 만나서 친구같이 살갑게 대하긴 틀렸으니, 각자 갈 길 가는 거지 뭐...!"
"참 나...! 아주 내가 답답해 죽겠네...! 기껏 아영이가 머리 써가면서 범인 색출해 냈던 것을..."
세현은 뒤늦게 무언가가 생각이라도 난 듯 해인에게 이야기 했다.
"아...! 그러니까, 고맙잖아...! 아영이... 아! 오늘 24일 이지? 그러고보니 아영이한테 부탁했던 거 내일이네...!!"
"에? 아영이한테 또 뭐 부탁했었어?! 참 나, 부탁을 들어주면 뭐 하나...! 이렇게 해 준 사람 보람도 없이 흘려 보낼 거..."
세현은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저 먼 하늘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뭐야?? 무슨 부탁이길래 이렇게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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