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제주 돌’
한국 생태주의 정원의 대가 ‘베케 정원’ 김봉찬 대표의 말에 순간 뇌간에 섬광이 비쳤다. 아버지 대까지는 과수원이었던 공간을 정원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나누고 있었다. 한편에 있는, 한눈에 봐도 오래된 돌담을 가리키며 “왜 여기에 저게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쯤이야 싶었다. “제주에 원래 돌이 많잖아요?”, “아니”라는 답에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보태진 설명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돌이 있어서예요. 일부러 가져오거나 한 게 아니라 여기에 있어서, 그래서 저렇게 쌓아 놓은 거죠.”
글. 크립톤엑스 고미 제주사업본부장
역사와 삶, 문화가 닮긴 제주의 돌
그저 많은 것이 아니라 제주에서는 발을 딛는 곳마다 돌이 차인다. 여기서 ‘곳’은 바퀴 달린 것들에 양보한 도로가 아닌 길을 말한다. 사람들이 있는 공간일수록 발에 차일 확률이 높다. 일부러 가져다 둔 것도 아니지만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돌이 먼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돌로 담을 쌓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얼기설기 틈이 많고 규칙도 없으며 반듯하기보다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것들의 존재감은 오랜 시간에 걸쳐 채워진 것들이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품은 경험과 이유를 생각하면 그만 입을 다물게 된다. 거기에 단순히 ‘많아서’가 아니라 ‘거기에 있어서’라니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제주에서 돌은 인간사와 자연사를 모두 품은 존재다. 처음 섬이 만들어질 때부터 시작해 신과 어울려 살던 사람들이 신화의 일부가 되고, 척박한 환경 속에 자연재해나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견디며 오늘을 넘어 다음을 보는 과정과 함께했다.
이것만으로도 아주 훌륭하지만, 그 안에 축적된 민속 지식의 힘은 무한하고 무엇보다 강력하다.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생활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축적한 것들에 ‘지식’이란 분류를 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제도적 교육의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깨너머’의 지혜와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방식과 형태를 찾아내고 구성원들의 발상과 동의 과정을 거치면서 조정되고 축적된 것들이다.
제주의 돌담의 가치를 만드는 ‘돌챙이’ 제주는 여러 연구 자료에서 ‘제주도식 고인돌’을 분류했을 만큼 돌을 이용한 역사가 길다. 961년 중국 송나라 왕부가 쓴 「당회요」 <탐라국조>에 ‘탐라인들의 집은 둥글게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었다’라고 쓴 내용도 찾을 수 있다. 고려 명종 때인 1234년 제주 판관이던 김구가 백성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밭담을 쌓아 경계를 만들었다거나, 조선 세종 7년(1425년) 해안가 말 방목으로 인한 민원이 커지면서 고득종이 한라산 중턱으로 목장을 옮기며 돌로 담을 쌓아 구역을 만들 것을 건의했다는 기록도 있다. 산담을 사이에 놓고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상상력이 신화를 만든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돌을 쌓는 것에서 철학과 기술적 완성을 이룬 사실은 오늘에 접목해도 하나 어색하지 않다. 밭담 정도는 그저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을 가져다 그냥 쌓아 올렸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 안에는 이치가 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돌 일’을 했던 돌챙이(석공을 이르는 제주어)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그래서 더 귀에 꽂힌다. 바다가 가까우면 배를 타고, 땅이 있으면 농사라도 짓겠지만 그러지 못해 가난을 달고 살았던 이들에게는 ‘맨손’이 재산이었다. 단순히 품을 파는 일이 아니라 거친 돌을 깨고 다듬고 쌓았던 삶이 녹록할 리 없었지만, 그 안에서 찾은 것들은 정직해서 더 힘이 있다. 돌로 담을 쌓는 것이 균형을 맞추는 데 맞춰진다면 집이나 창고를 짓는 일에 이르면 돌의 특성 외에도 인력과 마찰력, 지역 정보를 충분히 수집해 반영해야 한다. 경험과 기술이 충분하지 않으면 오래 공을 들이더라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잘못되면 당장 생명과 재산에 피해가 생긴다.
지금 생각하면 시멘트 등을 이용해 접착력을 높이고 반듯하게 잘 깎아 형태를 잡으면 되지 싶겠지만 중장비나 전문가 하나 없던 시절에 축조한 돌건축물이 잘 버티고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지혜를 허투루 볼 수 없다. 더 마음이 가는 부분은 그 많은 돌을 구해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찾아 쓰임을 만든다는 점이다.
“돌멩이는 안 맞는 게 어신다. 돌리다 보면 다 맞나(담 등을 쌓을 때 크기에 맞는 돌을 찾아 쓰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맞춰 돌을 쓴다는 말)”의 지혜다. 규칙 없이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제주 돌담이 사실 ‘그렝이 공법’이라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 기법과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면 더 크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돌챙이들은 다 쌓은 돌담을 한쪽 귀퉁이에서 흔들어 맞은편 귀퉁이까지 덜걱거리면서도 위치를 지키는지 살핀다. 그것이 우리가 보는 틈이다.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비가 들이치고, 눈이 쌓였다가 또 녹는다. 어떤 돌담은 방풍림의 성격에 따라 낮게 자리를 잡고, 어떤 경우는 행여 집안으로 바람이 들까 견고한 높이를 자랑한다. 이끼며 풀 나무가 엉겨 조형미를 더하는 일도 허용한다.
오로지 ‘제주’라는 이유로 가능한
이런 돌담이, 돌 문화가 전통 이상으로 오늘과 맞닿는 이유를 지역에서 찾는다. 수도권 도시를 제외한 지역 정도로 여겨졌던 개념은 균형 발전과 소멸 위기의 변수가 보태지면 ‘지역을 기반으로 지역자원을 활용해 자생할 수 있는 힘을 찾는’ 영역으로 확장됐다.
공공 주도 프로젝트의 한계를 인정하고 차별화한 지역특화적 창발(創發) 모델을 활성화하는 시도와 의견도 쏟아진다. 다시 찬찬히 살펴보면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다. 낙후된 지역을 개발해 살리겠다는 구상은 거의 모든 정부가 펼쳤던 주요 정책 중 하나다. 도시재생이나 마을 만들기 같은 이슈가 등장한 것도 꽤 오래됐다.
‘수도권을 억제해 지방이 반사적으로 이익을 얻게 한다’는 수도권정비계획 구상 아래 기업도시와 혁신도시라는 이름으로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등 다양한 정책과 사업들이 시도되고 성과를 내는 듯했지만 듀플리케이션(Duplication·복제화)과 둥지 내몰림, 인구 성장세가 둔화된 상황에서 인구를 빼앗기는 지역은 쇠퇴할 수밖에 없는 ‘제로섬 게임’이 반복되고 있는 점도 여전하다. 꽤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서 생태계로 지역이 원래 가지고 있는 ‘회복력’과 정체성(고유성), 다양성을 살려야 한다는 사실도 재확인했다. 다행인 것은 그 안에서 뿌리를 내리거나 씨를 뿌린 지역 창업가들의 존재다.
왜 제주의 로컬 창업 영역이 강한가 묻는다면 제주여서 그렇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지역이자 섬이라는 한계성을 뒤집어, 그렇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을 치열하게 찾은 결과다.
제주 스타트업 생태계의 돌챙이
돌담을 쌓듯 제주 창업가들을 발굴하고 위치를 확인한 뒤 그들이 연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다음 단계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정책 사업 같은 딱딱한 틀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제주의 로컬 스타트업 영역이 타 지역에 비해 활발하고 견고한 이유는 ‘돌챙이 역할’에 있다.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가 지난 2018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제이커넥트데이(J-Connect Day)’는 다양한 영역과 지역에서 활동하는 지역 혁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는 실천·지식공동체의 장으로 지역 혁신의 주요 과제와 방향성을 제시해 왔다. 올해 역시 지역 활성화를 목적으로 한 새로운 정책 기조를 살피고 창업가들의 사업 공유와 연대를 공고히 하는 자리로 기획되고 있다. 도민 자본을 바탕으로 한 ‘스타트업 아일랜드 제주 개인투자조합’도 지역형이라는 무대를 단단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제주스타트업협회 등 제주지역 36개 협력기관 주최로 지난 9월 열린 창업가 네트워킹 컨퍼런스 ‘스윜아일랜드’는 그 확장형으로 지속가능한 창업 생태계의 마찰력을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관들만이 아니라 마을이, 공동체가 움직이는 다양한 실험이 시험을 거쳐 사업적인 틀을 갖춰가는 것들도 본다.
사실 돌을 쌓는 제주의 힘, 그 배경에는 ‘수호(守護)’가 있다. 반듯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더라도 몇 번이고 방향을 바꾸고 자리를 옮기면서 맞춰가는 지혜도 품고 있다. 덜컥거리고 흔들거려도 다시 자리를 찾는 회복탄력의 에너지는 또 어떠한가. 일제강점기 제주 성벽을 허물어 그 돌로 제주항을 축조하고, 탑동 매립 과정에서 먹돌 해안이 사라지는 일이 있었지만 그런 잘못을 다시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를 배웠다. 현재, 그리고 미래형 ‘돌’과 ‘돌챙이’를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가 지역 경쟁력이 된다. 좋고 훌륭한 예도 많고 ‘힙’하다는 모델도 쏟아진다. 다만 제주에, 지역에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알고 있으니 잘 수호하면 된다는 말은 믿어준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냥 믿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것도 포함하는 의미다. 제주의 돌들이 그러하지 않은가. 그렇게 돌고 돌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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