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
일본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부모님 집에 갔었다. 엄마는 혼자 휴가를 즐기고 온 주제에 빈손으로 간 나를 마중까지 나왔었는데 횡단보도에서 새카맣게 그을린 나를 마주쳤을 때 한눈에 알아보질 못했더랬다. 지난 주말에 나를 만나서는 '그새 좀 하얘졌나 봐. 건강해 보여서 좋아'라고 했다. 아주 드문 일이게도 일주일 만에 다시 집에 와서는 '올해는 이미 지나갔지만 내년 여름 되기 전에 에어컨 꼭 사줄게' 하는 나에게 그냥 해본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잠시도 에어컨 없이 지내기 힘든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섬이라서 더 더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이키섬에서는 굳이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지낼만했었다. 창문을 열어놓고 일본식 다다미방에 누워있으면 바람이 솔솔 불어와 더위 때문에 불쾌한 느낌 없이 스르륵 잠에 빠져들기도 했었다. 비교적 더위에는 강한 편인 나는 무더운 여름이 그다지 괴롭지 않은데 오히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때면 여름이 가는 것이 아쉬워지곤 한다. 새벽 출근길이 조금 어두워진 걸 보니 이제 여름도 한풀 꺾이고 물러갈 일만 남았나 보다. 가을에 이키섬은 하늘도 훨씬 높고 맑아 전망대에 오르면 더 멀리까지 볼 수 있다고 하던데 여름이 지나간 뒤의 모습은 어떨지 문득 궁금해진다.
서울 이곳에서는 기껏해야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러 오고 갈 때나 한여름의 열기를 실감한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은 시원한 사무실에서 더위를 잊은 채 지내고 있으니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축복일 테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고마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배부른 소리일 테지. 그렇게 배부른 소리를 해대며 나는 요즘 종종 이키의 에메랄드빛 투명하고 영롱한 바다를 떠올린다.
사흘을 묵었던 숙소에서 감사하게도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다구치상'을 만났다. 연세는 우리 아빠보다도 몇 살쯤 위인데, 나이를 뛰어넘어 이키섬에 머무르는 동안 내내 친구처럼 지냈다. 이키 관광연맹에서 일을 했었던 그는 나를 데리고 이키 구석구석 구경을 시켜주기도 했고 그의 친구의 가족 식사에 초대해주기도 했다. 자신을 '대머리 아빠'라고 소개했던 다구치상의 친구 다카시상은 굉장히 활달하고 유쾌한 분이었는데 6년째 한국 드라마에 빠져서 하루에 서너 시간씩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말도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 연예인 중 장나라, 장윤정, 홍진영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아마도 아담하고 귀여운 스타일이 그의 이상형인가 보다. 그가 한국어 공부하는 노트를 자랑하듯 보여주었는데 글씨가 '대머리 아빠'와는 어울리지 않게 여성스러운데다 귀엽기까지 했다.
저녁식사에 초대받았을 때 조금 얼떨떨했다. 그의 부인과 중학생인 딸은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데 내가 불편하게 여겨지진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다구치상이 옆에서 열심히 통역을 해주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중학생인 그의 딸은 밥 먹는 내내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맑게 웃어 주었는데, 그 모습이 십 대 소녀답게 수줍고 귀여웠다. 이키섬에서의 가장 즐거운 저녁이었다. 나를 포함한 어른들은 다양하게 안주를 시켜놓고 맥주를 마셨고, 소녀는 망고나 딸기가 들어간 하이볼을 마시며 어른들과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예의 바르면서도 천진한 모습에 말이 통하지 않아도 금세 정이 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많이 찾지 않는 작은 섬에서 나의 모국어인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다구치상을 만난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게다가 처음 만났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나를 기꺼이 식사에 초대해주고, 이것저것 음식을 먹어보라며 챙겨주고, 함께 사진을 찍은 뒤 오히려 내게 '고맙다'고 인사해주는 사람들을 만난 것은 아마도 내 여행 중에 가장 특별했던 일인 것 같다. 헤어질 때 '사요나라'하고 인사하던 순간에 마음이 꽤나 뭉클하기도 했으니, 분명 내게 오래도록 소중하고 따뜻한 추억으로 남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키섬에서는 휴가철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어디를 가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마치 섬 전체를 전세 내서 둘러보는 황홀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무리가 되지 않게 쉬엄쉬엄 움직이며 지냈다. 마지막 날이 되니 섬이 조금이나마 익숙하다 느껴졌고, 여행자이면서도 일상처럼 시작된 하루가 좋았다. 특별히 유명하다 할 것도 없는 섬이니 일정을 욕심내서 잡지 않아도 되었고, 먹는 음식들은 모두 다 내 입맛에 맞고 만족스러우니 불만도 없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따뜻한 도움 덕분에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간 날들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여행에서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좋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싼 돈을 들여 내가 여기까지 와서 뭐하고 있는 거지? 욕심내고 괜한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 무언가 기억에 남을만한 일을 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들볶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서울에 있을 때는 매일 같이 화가 나거나 후회되는 마음들이 생겨났고, 그 속에서 내가 나를 감당하지 못해 괴로웠었다. 이키에 머무르는 동안은 시간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여유가 생겨서인지 정말 편안하게 보냈다. 출퇴근길 10분 만이라도 이렇게 착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사람이든 장소든 너무 익숙해지면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키의 풍경이 익숙해질만하니 나도 그곳을 떠나와야 했다. 여행의 끝이 담담하게 느껴지는 날은 아마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싶다. 여행의 끝은 언제나 조금 아쉽고 서운하고 마음이 먹먹해지는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그곳에 잠시나마 머물렀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 아닐까.
언제까지나 그런 감수성을 간직한 채 여행하고 싶다. 언제나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현실로 다시 돌아갈 것에 겁내하면서. 그래도 떠나올 수 있었던 사실에 감사하며, 스스로 잘 해냈다는 대견함을 느끼면서.
그런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일일이 다 쓰진 않았지만, 혼자서 '오늘도 폐를 끼친 하루였습니다'하며 하루를 마무리할 만큼 나는 이키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그런 경험들이 사실은 내 여행을 풍성하게 만들었음을 알고 있다. 여행하는 동안 만큼은 모든게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었다. 여행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모든 과정과 결과가 나의 선택이고 책임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그것을 배웠다.
일상을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일 거다. 사람 때문에 마음 다치고 상처받고, 일 때문에 무기력해지고 힘겹다 느껴지는 순간에도 되도록이면 남 탓하지 말고 나의 선택이자 책임이라고 나를 다독이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이 단단해진다면 좋겠다.
이번 여행을 돌아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조금은 단단해졌음을 느낀다. 오로지 나 하나만 믿고 떠났던 여행을 그래도 꽤 잘 해냈으니 딱 그만큼만 씩씩해졌기를.
그리고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다음 여행 때는 배낭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꾸릴 수 있기를 바란다.
'사요나라' 이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