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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마 Sep 20. 2016

'타이레놀',
이 약 한 알이면 다 잘 될거야

변요한 주연, 청년의 삶 소재로 한 재기발랄 범죄물


단편 히치하이킹, 첫 번째 영화 '타이레놀'



얼핏 긴장한듯한 표정의 청년이 제약기업의 면접을 보고 있다. 과거 이 기업의 연구직에 지원했다 탈락한 이력이 있는 청년은 이번엔 영업직으로 직무를 바꿔 면접 전형까지 올라왔다. 웃음과 여유를 유들유들 입가에 단 면접관은 묻는다. 직무를 바꿔 다시 지원한 이유가 뭐냐고. '취업난'이란 태그가 청춘의 삶을 엮는 이 시대, 화학을 전공한 지원자가 연구직에서 탈락을 거듭하고 비교적 문이 넓은 영업직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구직 베테랑인 청년은 이 회사를 다시 찾은 이유를 묻는 면접관의 의도를 꿰뚫고 있다. 흔한 사례 중 하나이니 질문을 예상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이제 청년은, 굳어있던 표정을 천천히 푼다. 그리고 대학 시절 경험을 통해 배웠다는 제약 마케팅의 실전을 줄줄 읊기 시작한다. 유통망 확보, 원가 절감, 촉매제 확보, 정제된 제조법, 특허 출원부터 임상실험까지, 전문적이고도 실용적인 툴이다. 막힘 없고 자신 있는 그의 대답은 어느덧 면접관들의 호감을 산다. 창업 스터디에서 제약 사업을 하며 체득했다는 이론이, 그럴싸함을 넘어 꽤 논리적이다. 


창업 스터디라…. 사실 청년에겐 비밀이 하나 있다.


[사진=영화 '타이레놀' 공식 스틸컷]



 스포일러



영화 '타이레놀'(감독 홍기원, 29min, 2014)을 여는 장면은 백색의 가루를 이리 저리 가공하는 주인공 종수(변요한 분)의 모습이다. 흰 알약을 믹서기에 갈기도 하고, 가루가 된 약물을 캡슐에 가두기도 하는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그리고 이 약에 대해 "아무 효능이 없다"고 말하는 종수의 내레이션과 함께 시점은 위의 면접장으로 이동한다. 종수의 표정은 묘하다. 여느 지원자처럼 긴장한 내색이지만, 눈빛 한켠엔 묘한 설렘이 읽힌다. 긴장을 위장한 흥분이 눈에 어린다.


주인공 종수는 적당히 선해보이는 인상을 지녔고, 또래의 대학 졸업생들처럼 취업 준비에 한창이다. 자백에 따르면 '스펙'은 결코 평균을 웃돌지 못한다. 토익은 600점, 지방대를 졸업했고 이미 학자금 대출로 3천만 원의 빚을 지고 있다. 어린 시절엔 말을 더듬었다. 꼭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자존감도 조금 낮다. "여자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혼자 하면 계획대로 안 돼. 다 차이고, 다 까이고, X발."


그런 종수가 면접관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실용적이고도 전문적인 마케팅 이론을 체득할 수 있었던 배경, 바로 그것이 '타이레놀'의 알맹이 줄거리다. 결론부터 말하면, 종수는 마약 제조자다. 이제 그를 합격시킬 회사는 종수가 만들 약물의 촉매체를 제공할 것이다.


[사진=영화 '타이레놀' 공식 스틸컷]



고통도 양심도, 이 약으로 잊으세요


종수에겐 "48개월씩 매달 104만원"을 갚아야 할 빚이 있다. 그에게 이런 큰 돈을 빌려 준 사람은 사채업과 마약 중개를 겸하는 낚시터 김 사장이다. 빨리 취직해 4년 안에 돈을 갚겠다며 애걸복걸하는 종수를, 이 곳에서 마약 중개업의 신성이 되길 꿈꾸던 고등학교 동창 재기가 우연히 알아본다. 화학을 전공한 종수에게 재기는 함께 마약을 제조해 유통할 것을 제안한다. 타이레놀을 원료로 한 초짜들의 마약 제조는 의외로 성공적이다. 둘은 급기야 업계의 빅마우스들을 사로잡고, 일본 발 20억 원짜리 주문을 받아들곤 미친 듯 기뻐한다.


그러다 이들은 정말로 미치는 단계에 이른다. 매출 급감의 주 원인이 자신들의 사업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겁박해오는 김 사장의 뒷통수를 살벌하게 친다. 종수가 만든 극약이 주효했다. 이 달콤하고 위험한 사업에 몸을 담고도 여전히 제약기업 취업을 준비 중이지만, 이제 마약을 만들기 전의 종수는 어디에도 없다. 그의 욕망은 '안정된 회사 생활'에서 '안정된 마약 제조'로 사뿐히 이동했다. 종수의 입사(혹은 제조) 포부를 듣는 청자가 면접관에서 일본인 바이어로 일순간 바뀌는 것처럼.


종수는 이 세대의 유사 종수들에게 달콤하게 속삭인다. "이 약 한 알이면 다 잘 될 것"이라며, 자신을 어두운 희망의 근거로 기꺼이 내세운다. 주머니 속 한 알의 약은 이제 편의점에서도 구할 수 있는, 흔하디 흔한 타이레놀이다. 누군가에겐 진통제로, 그리고 여기선 '저가의 마약 주원료'로 통하는 그 약. 탈출구가 없어보이는 만성적 고난을 살아내며, 청년들은 흔들린다. 한 알의 약이 뿜어내는 뭉근한 기운에 취할 기회가 가까이에 있다. 진통제의 껍질을 벗고 마약이 되는 타이레놀은 이제 고통을 넘어 윤리도, 도덕도 잊게 만드는 존재다. 더없이 유혹적이다. 고통을 잊게 하거나, 윤리를 잊게 하거나. 영화는 이렇게 제목과 소재의 중의성을 주제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한다.


앞으로 많은 단편들을 소개하며 지겹도록 언급하게 될 (그래서 더 언급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지만, 작은 예산으로도 장르적 재미를 최대한 살린 '타이레놀'의 연출은 호평을 받아 마땅한듯 보인다. 이미 숱하게 재현돼 기시감이 일 정도인 '취업 준비생의 고군분투'를 위장술로 삼아 금세 기민한 범죄물의 속살을 꺼내보이는 구성이 흥미롭다. 영화의 시작과 끝, 신의 재배열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점의 이동도 매끄럽다.


[사진=영화 '타이레놀' 공식 스틸컷]

그리고, 변요한


독립 장편영화 '들개'와 '소셜포비아', tvN 드라마 '미생' 등으로 주목받기 전, 종수 역 배우 변요한은 수십 편의 단편영화에 출연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지난 2015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돼 관객상을,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 초청돼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타이레놀'은 변요한이 '핫스타'의 타이틀을 거머쥐기 전 참여한 작품이다. 앞서 출연했던 단편 '목격자의 밤' '토요근무' 등에서도 이 시대 청춘의 표상을 그려냈던 변요한은 '타이레놀'을 통해 보다 입체적인 매력을 펼쳐보였다. 평범하디 평범한 '취준생'의 녹슨 얼굴부터 위태롭게 욕망을 학습한 자의 비릿한 눈빛까지, 29분의 러닝타임이 아쉬울 만큼 밀도 높은 연기를 선보인다.


(극 중 종수가 학창시절 말을 더듬는 버릇으로 놀림을 받았음이 언급되는 장면은 공교롭다. 배우 변요한이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 역시 말을 더듬는 버릇이었다.)


*'타이레놀'을 볼 수 있는 곳 : K'ARTS 미디어콘텐츠센터

http://kmc.karts.ac.kr/services/front/contents/video/detail?M_CD=SHORT_FILM&MEDIA_IDX=621



***'단편 히치하이킹'이 다룰 두 번째 영화는 지난 2015년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뒤 올해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4만번의 구타 부문 최우수작품상과 Btv 관객상을 수상한 '몸값'(감독 이충현)이다. 

***'타이레놀'에서 '몸값'으로의 히치하이킹은 재치와 발칙함이 넘치는 범죄영화의 장르성이라는 공통점 덕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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