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회 칸국제영화제 단편 황금종려상 수상작
여자는 불법 게임장에서 쓰이는 상품권을 현금으로 바꿔주는 환전소에서 일을 한다. 사행성 게임 사업장을 지탱하는 여자의 환전 업무는 엄연히 불법이다. 도난을 피해야 할 환전소 안 공간은 낡은 창살과 보안 장치로 고립돼있다. 이런 곳에서, 도박 중독자들을 마주해야 하는 일. 여러 모로 찝찝한 아르바이트다. 여자는 사장에게 가불 한 임금을 갚고 이 일을 그만두려 한다. 상품권 수를 속여 돈을 더 챙겨 모으다 보면 비교적 빨리 돈을 갚을 수 있을 것 같다. 내놓은 상품권의 가치보다 환산되는 돈이 적다며 항의하는 고객들이 있지만, 증거가 없지 않나. 게다가 이 일은 피차 불법이다. 아찔하지만 짧은 이 순간들을 넘기고 넘겨 어서 일을 그만둬야 한다. 이 날의 정황도 그랬다.
말씨만으로도 광기를 풍기는 한 남자가 환전을 하러 왔다. 불법 게임에 중독된 사람인 것 같다. 창구로 내민 손은 때로 얼룩졌고, 가운데 손가락은 피맺힌 밴드로 싸여 있다. 불행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돈을 빼돌렸다는 것에 분개한다. 그가 사장을 공격하자, 여자는 겁에 질려 환전소 밖으로 몸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경찰차를 보고도 다시 감옥 같은 환전소 안에 몸을 숨긴다. 자신이 해온 일이 명백한 불법 행위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멀쩡한 정신이 아닌 것 같은 이 남자는 손에 망치를 들었다. 단단해만 보였던 환전소의 문은 분노 어린 남자의 망치질로 흔들린다. 여자에겐 도리가 없다. 좁은 이 공간 안엔 여자 자신과, 금고뿐이다.
스포일러
영화 '세이프'(감독 문병곤, 13min, 2013)에 담긴 서사의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는 '돈'이다. 돈을 벌려다, 중독처럼 돈을 좇는 사람에게 쫓겨, 돈을 보관하는 금고에 마치 돈처럼 갇혀버린 여자의 이야기다. 소재와 배경의 함축성을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 안의 현실을 다층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영화다.
여자(이민지 분)는 노동 시간 대비 벌이는 좋지만 불법인 데다 업무 환경이 쾌적하지 않은 환전소 일을 그만두고 싶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시작했을 여자는 가불금을 빨리 갚는 방법으로 불법 게임장의 고객들을 속이는 길을 택한다. 게임을 하는 사람도, 그들을 고객 삼아 돈을 바꿔주는 사람도 모두 법망 바깥 금전 거래에 동참하고 있다. 돈이 필요해 불법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여자는 돈을 좇는 범법자들의 돈을 빼돌린다. 하지만 여자의 궁여지책은 되려 그 자신을 애초의 목적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리고 만다. 일을 그만두기로 한 결심은 여자의 양심이 돈에 우선했다는 증거지만, 결심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또 한 번 양심을 배반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불법 게임에 중독된 듯 보이는 남자는 광기에 차 있다. 상품권에서 환전한 돈을 빼돌린 것으로 보이는 이 직원도 분노의 대상이다. 망치를 휘둘러 사장을 쓰러뜨린 남자는 여자가 숨어 있는 좁디좁은 환전소 안으로 쳐들어가기 직전이다.
오갈 곳 없이 환전소 안에 갇힌 여자에겐 과격한 고객을 피할 방책이 없다. 망치를 든 남자가 문을 때린다. 하릴없이 우그러지는 문처럼 저 망치에 얻어맞을 순간이 오고 있다. 여자는 환전소 안의 금고에 숨기로 결정한다. 공간 안 유일한 피신처다. 철로 만들어진 금고는 튼튼하다. 남자의 공격도 잘 버텨낸다. 어쩌면 여자는 잠잠해진 틈을 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휴대폰의 배터리가 속절없이 닳아버리지만 않았다면.
금고는 안에서 열지 못한다. 돈에는 손이 없다. 돈의 자리를 차지한 여자도, 그래서 스스로 나갈 길이 없다. 가장 튼튼하고, 또 안전해보였던 금고는 그 내구성만큼이나 효과적으로 그녀를 삶으로부터 격리시키고 말았다.
여자의 외침은 공허하게 울린다.
세이프(Safe), 언세이프(Unsafe)
'세이프'라는 제목의 중의성은 영화의 서사와 빈틈없이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제목에 쓰인 영어 단어 'Safe'는 '금고'를 뜻하는 명사이자 '안전한'을 의미하는 형용사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가장 '안전해 보이는(Safe)' '금고(Safe)'에 몸을 숨긴 여자가 결국 '안전하지 못한(Unsafe)' 상황에 처하게 되는 이야기가 '세이프'의 줄거리다. 이는 불법 환전소 아르바이트를 그만둠으로써 양심적·물리적 '안전(Safe)'을 확보하려 했던 여자가 최대한 빨리 가불금을 갚는 과정에서 '위험한(Unsafe)' 사건을 만나게 되는 과정과도 완벽하게 호응한다.
영화는 불법 환전소에서 이뤄지는 상품권과 현금의 교환 과정을 중요한 사건으로 삼는다. 문병곤 감독은 영화의 연출 의도에 대해 알리며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은유"를 언급한 바 있다. 영화 속 여자의 행위가 '돈이 돈을 버는' 금융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총체적으로 상징할 수는 없지만, 등가교환을 둘러싼 인물들의 대립을 확대해 해석하면 어렵지 않게 납득되는 설명이다. 이에 더해 금고에 갇힌 여자의 모습에선 종종 돈과 인간의 가치 교환이 일어나는 현실의 비극도 읽힌다. 안에서 열 수 없는 금고에 고립돼 자유 의지를 박탈당한 인간의 모습은 허무하고 또 처절하다.
상징적인 장치들로 주제와 소재를 흥미롭게 꿰어낸 감독은 극 중의 제한된 공간,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도 몰입도 있는 수작을 완성해냈다. 특히 남자가 환전소 창구를 손가락으로 연속해 두드리는 장면에선 소리를 활용한 영리한 연출이 돋보인다. 14분의 시간 동안 짧고 굵은 서스펜스를 느끼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세이프'는 지난 2013년 제66회 칸국제영화제 단편 부문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이 부문에서 최고상으로 불리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한국 감독은 문병곤뿐이다.
그리고, 이민지
맞다. '그 이민지'다. 불법 환전소에서 일하다 위험에 처하는 여자를 연기한 배우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장만옥 역을 맡아 배우 안재홍과 사랑스러운 로맨스를 그려냈던 그 교정기 소녀다. 3년 전 당시만 해도 다수의 독립영화(특히 단편영화)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쌓았던 이민지는 화려한 수상 이력을 안게 된 '세이프'로 영화계에 확실히 눈도장을 찍는다. 이민지의 피로하면서도 심드렁한 표정, 위기의 상황에서 공포에 질려버린 눈빛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정서가 된다.
사실 단편영화계에서 이민지의 이력은 여느 유명 감독들 못지않다. 주연을 맡은 단편 영화 '부서진 밤'(감독 양효주, 2010)은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고 '애드벌룬'(감독 이우정, 2011)은 이듬해 같은 영화제 단편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또 다른 출연작 '달이 기울면'(감독 정소영, 2013)은 제12회 미쟝센단편영화제 박찬욱감독특별상 수상작이다.
***'단편 히치하이킹'이 다룰 네 번째 영화는 앞서 언급한 '달이 기울면'이다. 지반침하로 인해 사람들이 떠난 동네에서 홀로 집을 지키고 있는 소녀가 오래도록 집을 떠나 있던 오빠와 재회하는 이야기다.
***'세이프'에서 '달이 기울면'으로의 히치하이킹은 단연 주연 배우 이민지의 존재감에서 비롯됐다. 두 영화에서 모두 주연을 맡아 또렷한 인상을 남긴 이민지의 전작을 연이어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