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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마 Oct 03. 2016

'달이 기울면', 그리운 사람이 온다

제의가 된 꿈, 그리움과 죄의식에 대한 이야기


단편 히치하이킹, 네 번째 영화 '달이 기울면'


마을의 풍경은 재개발을 앞둔 여느 동네처럼 황량하다. 지반 침하로 인해 땅이 기울고 있는 이 동네에 남은 주민은 이제 한 명의 여자뿐이다. 적당히 허름한, 혼자 살기엔 더없이 허전하고 쓸쓸한 크기의 집안에서, 여자는 홀로 힘겹게 가구를 옮긴다. 곧 이사를 떠날 이웃이 찾아왔다. 남은 여자가 안쓰러워 과일과 술, 통조림 따위를 건넨다. 물건은 문짝 옆 깨어진 창으로 전달된다. 기울어져 틀어진 문틀 탓에 현관조차 열리지 않는 탓이다. 이웃은 몇 해 전 집을 나간 여자의 오빠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어서 이 기울어진 세계를 떠날 것을 권한다. 어찌 됐든, 오늘 여자는 홀로 부모의 제사를 지낼 참이다.


여자에겐 오빠가 있다. 여동생을 혼자 두고 오래도록 연락조차 되지 않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이 들어있었을 통장과 선물로 받은 엠피쓰리까지 들고 달아났던 사람이다. 그래도 부모의 제삿날엔 집에 들러줬으면 했다. 수평이 어긋난 땅 위의 냉장고에서 과일들이 굴러 떨어지고 가구들은 제 멋대로 움직이는, 오늘처럼 비가 새는 날엔 더 을씨년스러운 이 집에 되도록 혼자 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제사상을 준비하려는 여자의 귀에 낯선 소음이 포착된다. 인기척이다. 익숙하면서도 갑작스러운 공포가 여자를 찾아왔다. 소리는 현관을 지나 부엌에 난 작은 창문으로 이동했다. 여자를 부르는 목소리, 누군가 비좁은 창틈으로 몸을 들이민다.


오빠가, 돌아왔다.


정소영 감독 영화 '달이 기울면' 화면 캡처



스포일러


영화 '달이 기울면'(감독 정소영, 24min, 2013)의 배경은 철거를 앞둔 주택들이 즐비한 마을이다. 빨간색 라커로 쓰인 '붕괴 위험'이나 알파벳 엑스(X)가 대문과 담장을 덮어버렸다. 쓰레기 더미 위에 지어진 마을은 지반 침하로 기울기 시작했다. 마지막 이삿짐이 동네를 떠나고, 이제 이 곳에 남은 사람은 여자 재아(이민지 분) 뿐이다. 가족 없이 홀로 이 집을 지키고 있는 재아는 오래전 집을 나간 오빠 재욱(김도형 분)을 기다린다. 부모님의 제삿날에도 연락이 없는 오빠의 휴대전화에 재아는 짜증 섞인 음성 메시지를 남긴다.


집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졌다. 벽면의 대칭이 맞지 않고, 바닥도 수평을 잃었다. 틀어진 현관은 잘 열리지조차 않으며 냉장고의 과일과 통조림은 힘 없이 미끄러진다. 비가 오면 비가 새고, 무거운 가구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인적 드문 주택에 혼자 사는 재아에게 이 스산한 일상은 때로 공포다. 라디오 뉴스 속 흉악 범죄가, 인기척이, 보이스피싱이 두렵다. 제사상을 마련하던 재아는 누군가 집 밖을 서성이는 소리에 혼비백산한다. 열리지 않는 현관이 아닌 부엌의 작은 창문으로 집에 들어온 사람은, 기다리던 오빠였다.


오빠는 마치 어제 보고 오늘 본 양 재아를 대한다. 비를 쫄딱 맞고 들어와 몸을 씻는다. 발에는 딸랑이는 방울 액세서리를, 목에는 수건을 걸었다. 트렁크 팬티 차림으로 터덜 터덜 집 안을 걸어 다니더니 "집 꼴이 이게 뭐냐"며 핀잔을 준다. 한참 동안이나 연락 없이 살아놓곤 "이사를 가든지 해야지 여태 이러고 있냐"는 둥 철없는 소리만 해 댄다. 우비인지 작업복인지 모를 점퍼를 입고 제사를 지내겠다고 해 재아와 실랑이를 벌이기도 한다. "이게 내 유니폼이고 상복이야"라며 고집을 부리는 오빠지만, 창문에 못질도 해 주며 그간 재아가 겪었을 고생을 위로한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남매의 제사는 쉽지 않다. 상 위에 정성스레 제기를 올려봐도, 금세 미끄러지고 만다. 오빠는 거실 한편 바닥을 망치로 깨부수기 시작한다. 어두운 지하 통로가 나타나고, 오빠는 그 아래로 내려간다. 재아도 그를 따라나선다. 마치 동굴 같은 공간에서, 남매는 제사를 지낸다. 제사상은 비로소 수평을 찾는다. 여전히 철없는 소년 같은 오빠지만, 재아는 함께 제사를 지낼 사람이 있어 마음 한 구석에 온기를 얻었다. 그런데 오빠가 이상하다. 부모님을 향해 "엄마, 아버지, 재아는 씩씩하니까 혼자서 잘 할 거예요"라며, 곧 다시 떠날 사람 같은 말을 한다.


"나 이제 가야 돼. 나 찾는 사람 올 거거든. 시간이 없어."


누군가 시끄럽게 문을 두드린다. 아니, 이 집을 통째로 흔드는 것만 같다. 집 안의 모든 것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한쪽으로 쏠려간다. 창문을 뒤흔드는 검은 정체들이 공포스럽다. 재아는 집이 거꾸로 뒤집힌 것만 같은 엄청난 흔들림 속에 울부짖는다. 그리고 절망의 상황에서, 오빠와의 어린 시절이 현재와 병치된다. 지하처럼 어두운 곳에서 놀다 바깥으로 기어나가려는 어린 오빠와, 아직 그 어두운 공간 안에 궁금한 것이 많던 재아는 과거에도 실랑이를 벌였다. 빨리 나오라는 오빠, 재촉에도 말을 듣지 않는 재아. 재아를 데리러 가던 오빠의 다리 위로 철근 같은 기구가 추락했다.


다시 현재다. 지진 같은 진동이 한 차례 지나가고, 쓰러졌던 재아는 의식을 찾아 문을 부수고 들어온 이웃 아주머니와 남자들을 마주한다. 재아와 연락이닿지 않아 불안했던 아주머니는 억지로 문을 따고 재아를 만나러 왔다. 그는 비보를 전한다. 남자들이 오빠 재욱의 유품을 가지고 왔다고. 재아는 가방을 연다. 우비인지 작업복인지 모를 그 점퍼와 옷가지, 그리고 의족이 있다. 아까는 발에 걸고 있던 방울도 함께. 재아는 그렇게 꿈에서 깨어난다. 꿈에서 오빠와 함께 제사를 지낸, 어린 시절의 기억이 깃든 지하 공간을 들춘다. 밝은 빛이 넘쳐흐른다.


정소영 감독 영화 '달이 기울면' 화면 캡처



죄의식, 그리움


재아의 꿈은 씻기지 않은 죄의식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어린 시절 자신을 데리고 나오려다 한쪽 다리를 잃었던 오빠에 대한 기억은 꿈에서 두 다리가 모두 건강한 오빠의 모습으로 왜곡된다. 부모님의 제삿날, 부엌문이라는 통로를 통해 눈 앞에 나타난 오빠의 등장엔 현실성이 없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던 재아가 어린 시절 슈퍼에서 과자를 훔치다 걸렸을 때 자신을 두고 갔던 이유를 묻는 장면의 흐름도 비논리적이다. 이 모든 것은, 그리고 다시 묻지 못할 오래전 마음을 들춰내는 재아의 모습은 꿈 작업의 산물로 볼 때 비로소 자연스럽다.


집안에 못을 박으며 나름의 보수를 마친 오빠가 소파에 앉아 쉬는 모습은 재아로 하여금 꿈을 자각하게 만든 순간으로도 보인다. 현실의 기억에서 한 다리를 잃었던 오빠가 지금 눈 앞에선 그렇지 않음을, 재아는 목격한다. 제사를 지내던 오빠가 부모님에게 앞으로도 재아 혼자 이 집에 남을 것임을 예언하는 순간, 믿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수저를 가지러 올라가겠다고 말하는 재아의 모습도 비슷하게 풀이된다.


재아의 꿈은 그리움의 응축이자, 죄의식 가득한 제의다.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된 재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빠와 함께 제사를 지냈던 지하 공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빛은 음울하고 스산한 집 안의 공기와 대척점에 있는 정서를 그려낸다. 가장 어두울 것만 같은 지하 공간이 가장 밝은 빛을 내비친다. 혼자가 아니었던 때의 재아의 기억은 이 공간을 통해 소환된다.


'달이 기울면'은 제12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박찬욱감독 특별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배우 이민지가 홀로 남겨진 동생 재아 역을 연기했다. 삶의 무게와 그리움, 죄의식을 모두 짊어진 여주인공으로 분해 절제된 연기를 보여줬다. 큰 웃음 한 번 짓지 않는 캐릭터 안에서도 불안과 공포, 음울과 후회, 그리움의 정서를 모두 담아낸 연기라 할만하다. 이민지의 발랄하고 귀여운 미소가 친숙한 관객이라면, 3년 전 배우의 색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을 법한 작품이다.


*달이 기울면'을 볼 수 있는 곳 : K'ARTS 미디어콘텐츠센터

http://kmc.karts.ac.kr/services/front/contents/video/detail?U_CD=CONTENTS&M_CD=SHORT_FILM&PAGE_NO=1&PAGE_SIZE=8&BLOCK_SIZE=10&MEDIA_IDX=87&CATE_CD=&GENRE_CD=&MEDIA_TYPE=&SC_KEYWORD=%EB%8B%AC%EC%9D%B4+%EA%B8%B0%EC%9A%B8%EB%A9%B4


***'단편 히치하이킹'이 다룰 다섯 번째 영화는 엄태화 감독의 단편 영화 '숲'이다. 충무로의 재능 넘치는 신예 엄태구, 류혜영, 정영기가 주연을 맡았다. 지난 2012년 제11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절대악몽 부문 최우수작품상과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상 수상작을 결정하는 이 영화제에서 '숲' 이후 대상작은 한 편도 나오지 않았다.

***'달이 기울면'에서 '숲'으로의 히치하이킹은 죄의식과 꿈, 기억에 대한 서사라는 공통점 아래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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