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마 Oct 03. 2016

'숲', 아주 작은 오해의 끝



단편 히치하이킹, 다섯 번째 영화 '숲'


남자 태식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감독으로서의 출세가 '한 방'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친구 구정, 에스더와 함께 자신이 구상한 단편 영화를 찍기 위해 숲으로 모인다. 이들이 찍을 영화는 한 남자의 자살 장면을 담는 페이크 다큐멘터리다. 검정 슈트 안에 흰 셔츠를 갖춰 입은 태식은 이 영화의 감독이자 주연 배우다. 나무 아래 작은 의자를 놓고, 가지에 묶은 전선을 목에 매달고, 구정과 함께 사인을 주고받으면 완벽히 촬영이 준비된다. 이미 캐릭터의 감정에 심취한 남자는 예민해져 있다. 약속한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다는 에스더와 날카롭게 통화를 마치고, 아쉬운 대로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한다.


태식의 연기를 보며 카메라를 만지는 구정은 자꾸 날아 붙는 파리 때문에 주의가 흐트러졌다. 그래서 실수를 한다. 태식의 연기 전후에 촬영 버튼을 누른다는 게, 그 반대가 됐다. 혼신의 연기를 펼친 태식은 화면을 확인하고 크게 실망한다. 담긴 것은 연기를 시작하기 직전과 직후다. 하지만 태식은 이 순간의 분노조차 연기에 투영하려 애쓴다. 다시 한번 감정을 잡고 전선이 매달린 나무로 향한다. 제길, 목을 매달던 중요한 순간 벨소리가 울린다. 이번에도 에스더다. 촬영 중이라며 화를 내던 태식. 그의 분노에 의자가 쓰러졌다. 태식의 목은 진짜로 나무에 매달리고 말았다.


놀란 구정이 달려가 그의 다리를 껴안지만, 태식은 의식이 없다. "사람 살려"라는 구정의 목소리, 그리고 내동댕이쳐진 휴대폰 너머 에스더의 목소리만이 숲을 울린다. 구정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그래서 태식의 다리를 잠시 놓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가 태식의 다리를 품에서 놓는 순간, 전깃줄은 태식의 목을 더욱 강하게 감아버리고 말았다.


엄태화 감독 '숲' 공식 스틸컷

스포일러


영화 '숲'(감독 엄태구, 32min, 2012)의 배경은 크게 두 공간이다. 세 주인공이 영화를 찍는 장소인 숲과 구정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과수원이다. 숲과 과수원을 열 번이나 오가는 사이, 세 인물의 관계를 비롯해 영화의 감정선을 이끄는 구정의 심리도 서서히 또렷해진다. 공간의 분리는 이 영화의 시간적 시점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수단이다. 또한 이는 영화가 택한 꿈과 현실의 구분선이기도 하다.


숲에서 과수원으로의 시점 이동은 태식(엄태구 분)과 구정(정영기 분)이 영화의 첫 테이크를 촬영하던 장면 직후 일어난다. 숲에서와 달리 스포츠 브랜드의 저지 재킷을 입은 태식, 숲에서와 같이 핑크빛 티셔츠를 입은 구정, 흰 상의와 짧은 바지를 입은 에스더(류혜영 분)는 과수원의 경운기를 빌려 타고 평온해 보이는 숲 자락에 자리를 잡았다. 그에 앞서 태식은 구정에게 영화감독을 꿈꾸는 자신의 비전을 설명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시놉시스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구정은 태식의 계획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은 에스더의 진로다.


세 사람의 관계는 명확히 규명되지 않는 삼각관계다. 에스더의 관심이 태식과 구정 중 단 한 명에게 향해 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하지만 관객은 구정의 마음이 정확히 에스더를 향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에스더와 통화하는 태식을 보는 시선이나, 태식과 에스더의 투샷을 담는 그의 표정이 썩 유쾌하지 않다. 구정은 장난스럽게 자두를 베어 먹는 태식과 에스더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나뭇가지 아래서 림보 게임을 하는 둘의 모습을 찍기도 한다. 에스더에게나 자신에게나 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꺼내놓는 태식과 달리, 구정의 표정엔 어쩐지 자신감이 없다. 그저 조용히, 친구의 관계를 망치지만 않을 정도로, 에스더를 흠모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혹 에스더가 자신이 아닌 태식을 좋아한다 해도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구정의 시선을 조금만 벗어나 보면, 세 사람의 관계가 꼭 한쪽(태식-에스더)으로 기운 것으로만 보이진 않는다. 태식과 에스더는 과수원에서의 림보 게임에서도, 왕 게임에서도 구정에게 적극적으로 역할을 부여한다. 태식이 왕이 된 왕게임에서 뽀뽀 미션을 받은 에스더는 큰 망설임 없이 구정에게 다가간다. 태식은 림보 게임에 겁을 먹은 구정에게 "믿는다는 게 이런 거야"라며 등 뒤를 든든히 받쳐주기도 한다. 그러나 구정은 왕 게임 중 에스더에게 자신의 비밀을 귓속말로 이야기하는 태식을 보며 불안과 배신감에 휩싸인다. 태식이 말해버린 비밀이, 구정 자신이 에스더를 좋아한다는 사실일까 봐. 왕이 된 구정은 에스더의 모자를 저 멀리 던져버리곤 "2번이 주워와"라는 미션을 내건다. 2번을 뽑아 들었던 에스더가 일어서기도 전에, 태식은 벌떡 일어나 모자를 주우러 달려간다. 그리고 연못 안에 빠져버린 모자를 주우러 뛰어들었던 그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엄태화 감독 '숲' 공식 스틸컷

꿈이 허락한 자기 징벌



과수원과 숲이라는 공간의 분리가 현실과 꿈의 경계였다고 언급했듯, 영화의 시작을 열었던 숲에서의 장면들은 모두 구정의 꿈이다. 태식의 다리를 품에서 놓고, 의도치 않게 태식이 죽어가는 과정을 봐야 했던 구정은 숲이라는 고립된 공간 안에서 극한의 공포와 죄의식을 마주한다. 하지만 꿈의 비논리성은 태식에게 회생을 허락한다. 바닥에 쓰러졌다 의식을 찾은 태식은 직전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고, 모든 상황이 담겼을 비디오카메라를 확인하려 한다. 자신의 행동이 알려질까 봐 두려운 구정은 태식이 목을 매달려했던 전깃줄로 다시 태식의 목을 조른다. 그리고 외친다.


"내 잘못 아니야. 난 계속 가자고 했잖아.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그 의자도 에스더 네가 준 거잖아!"


이내 구정은 자신의 목을 조르며 자해를 시도한 뒤, 울며 사죄한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현실 속 태식의 죽음은 구정의 탓이면서도, 구정의 탓이 아닌 일이었다. 단지 태식은 제 몫이 아닌 게임의 명령을 수행하다 물에 빠졌을 뿐이다. 구정은 게임을 하던 중 에스더로 하여금 자신에게 뽀뽀를 하게 만든 짓궂은 태식에게 "내가 왕이 나와서 '너 죽어' 하면 진짜 죽을 거야?"라며 불만을 표했을 뿐이다. 하지만 태식의 속내를, 그가 말한 비밀을 의심했던 구정의 과거는 곧 태식을 향한 죄책감으로 남았다. 꿈에서나마 구정은 자신을 벌한다. 그것이 뒤로 넘어진 자신을 물속에 빠뜨리는 태식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장례식장에서 에스더를 만난 구정은 왕게임을 하던 중 태식이 속삭인 비밀에 대해 전해 듣는다. 자신의 오해를 깨달은 그는 웃는 듯도, 우는 듯도 하다. '구정이가 널 좋아한다'는 류의 이야기가 오갔을 줄로만 알았던 그 순간, 에스더의 귀로 흘러들어간 소리는 다만 "속닥속닥"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영화는 카메라에 담긴 태식의 시선을 짧게 보여준다. 이는 구정의 오해와 달리 결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던 이들의 관계를 표상한다. 자두를 베어 무는 에스더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구정의 얼굴이다.


엄태화 감독 '숲' 공식 스틸컷



엄태구, 류혜영, 그리고 정영기


꼼꼼한 서사와 연출에 더해, '숲'의 완성도를 정점으로 끌어올린 것은 배우들의 연기였다. 엄태화 감독의 친동생이자 영화 '차이나타운' '밀정' 등으로 주목받은 엄태구는 태식 역을 맡아 지금껏 잊히지 않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완성했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성보라 역으로 사랑받았던 류혜영은 '숲'과 '잉투기'에서 엄태화-엄태구 형제와 연이어 작업했다. 구정 역의 정영기는 영화의 정서를 이끄는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선량하지만 방어적이고 소심한 캐릭터 구정을 촘촘한 감정으로 채워냈다.


'숲'은 지난 2012년 제11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그 해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단편 영화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상 수상작을 결정하는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숲' 이후 4년 간 대상작은 없었다. 영화를 연출한 엄태화 감독은 독립 장편 영화 '잉투기'에 이어 강동원 주연의 첫 상업 장편 영화 '가려진 시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숲'을 볼 수 있는 곳 : 올레 TV에서 '숲' 검색 -> KAFA 상영관에서 시청


***'단편 히치하이킹'이 다룰 여섯 번째 영화는 장재현 감독의 단편 '12번째 보조 사제'다. 강동원, 김윤석 주연의 '검은 사제들'로 장편화 됐던 작품이다. 제13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절대악몽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숲'에서 '12번째 보조 사제'의 사이에는 단편으로 큰 주목을 받은 뒤 장편 데뷔에 성공한 감독들의 작품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공교롭게도 두 감독 모두 톱배우 강동원이 주연을 맡은 장편 영화를 작업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이 기울면', 그리운 사람이 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