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마 Mar 29. 2017

'12번째 보조사제', 우린 더 큰 싸움을 해야 돼


단편 히치하이킹, 여섯 번째 영화 '12번째 보조사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도심 한가운데, 로만 칼라를 갖춰 입은 청년이 성경 구절을 읊조린다. 저마다 분주하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틈, 앳된 얼굴을 한 부제의 눈에 불안감이 스친다. 부제가 기다리는 사람은 중년의 사제다. "처음이니까 긴장해." 묵직한 사제의 목소리가 부제의 귀를 스친다. 부제의 얼굴은 이미, 어떤 감정도 더할 수 없을 만큼 경직돼있다. 시끌벅적한 거리를 지나, 두 사람은 골목의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 선다. 건물 위를 까마귀가 난다. 거사를 앞둔 투사처럼, 신부는 비장한 눈으로 담배를 꺼내 문다.


두 사내의 대화는 마치 수수께끼 같다. 중년의 사제는 어린 부제에게 알 수 없는 당부를 이어간다. 절대 눈을 마주치지 말 것, 대답해주지도 듣지도 말 것, 그저 내가 알려준 것을 읽으며 반복할 것,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조심하고, 두려움을 들키지 말 것. 하지만 부제는 골목 끝 시야에 들어온 어떤 존재에 눈빛을 떨군다. 멀리 군인의 모습이 보인다. 거사의 직전까지 마음을 다잡지 못한 부제의 뺨을, 사제는 매섭게 후려친다.


이제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쳐서도, 대화를 섞어서도 안 될, 그리고 지금의 긴장감을 한 치도 드러내선 안 되는 그 대상을 만나러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이들이 마주할 상대는 의식 없이 침대에 누워 한 숨 한 숨을 간신히 쉬는 소녀다. 두 신부는 소녀의 몸을 묶고 의식을 시작한다. 바흐의 선율이 흐르고, 부제는 기도를 하고, 사제는 소녀의 몸에 십자가를 얹는다. 일순간 시퍼렇게 변해버린 소녀의 얼굴. 입가엔 미소가 떠오른다. 작은 입술이 열리고, 오늘은 반드시 처단해야 할, 그 간악한 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빌어먹을 바흐!"


장재현 감독 '12번째 보조사제' 공식 포스터



스포일러



'12번째 보조사제'(감독 장재현, 26min, 2014)는 잘 알려진 대로 영화 '검은 사제들'(감독 장재현, 2015)의 원작이 된 단편이다. '12번째 보조사제' 속 인물들의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외연을 확장해 장편화한 작품이 바로 '검은 사제들'이다. 단편의 부제 역을 이학주가, 장편의 같은 배역을 강동원이 연기했다. 김윤석이 연기한 장편 속 사제를 단편에선 박지일이 맡았다. 단편의 소녀 영신 역은 임성미가, 장편의 영신은 박소담이 소화했다.


캐스팅과 러닝타임 외, 단편이 장편화되며 변경된 지점은 더 있다. 바로 부제의 트라우마에 얽힌 내용이다. 장편 속 부제를 괴롭히는 기억은 어린 시절 사나운 개로부터 형제를 지키지 못했다는 트라우마다. 하지만 원작 속 부제는 군 성폭력 피해자다. 구마 의식을 앞두고 기도문을 외면서도 군복을 입은 청년들 앞에선 과거의 끔찍한 순간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장편 속 부제의 상처가 죄의식으로 설명된다면, 단편 속 부제의 트라우마가 낳은 감정은 공포와 수치심에 가까워보인다.


소녀 영신의 앞으로 돌아가자. 영신의 몸을 숙주삼은 악령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닌 목소리로 두 신부의 의식에 맞선다. 바흐의 음악에 분노를, 종소리에 괴로움을 분출한다. 폭포처럼 피를 내뿜으며 부제를 비웃는다. 악령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부제의 트라우마는 이 악한 존재의 놀잇감에 불과하다. 두려움을 들키고 만 부제의 정신은 악령의 농간을 버텨내지 못한다.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끔찍한 기억. 결국 부제는 악령의 냄새로 가득한 방을 뛰쳐나간다. 신발도 신치 못한 채다.



두려움을 마주하기



'12번째 보조사제'와 '검은 사제들'을 동시에 가로지르는 주제는 비교적 명확하다. 자신 안의 두려움을 박차고 일어서려는, 그래서 더 큰 선한 뜻을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숭고하고 고귀한 의지다. 인물들에게 악령의 농간은 때때로 자신을 호명하는 트라우마와 동일시된다. "어디에도 있다"는 말로 스스로를 설명하는 악령의 전지함은 구마 의식에 나선 젊은 부제의 뇌리를 쉽고도 간단하게 공략한다. 스스로 이겨내지 못한 고통을 외부의 존재가 소환하는 순간, 부제는 벽에 가로막힌다. 사제는 말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말이야, 일종의 용역 깡패 같은 거야. 입주자를 괴롭혀서 더 이상 못 살게 굴어 집에서 쫓아내는 거지. 입주자가 독해서 그 반대로 되는 일도 꽤 많긴 하지만. 언제나 우리의 빈틈과 치명적인 약점을 알고 있어. 그래서 다들 도망가고 포기해버리지."


사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제는 '치명적인 약점'을 후벼 파는 '입주자' 앞에서, 결국 '그 반대로 되는 일'을 겪고 만 셈이다. 하지만 '도망가고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다. 서툰 표정도 그 숭고한 용기를 숨기진 못한다. 다시 안으로 들어서는 부제의 모습이 영화의 끝을 담담하게 장식한다. 성직자라는 특수한 신분의 인물들을 화자로 택했지만, '12번째 보조 사제', 그리고 '검은 사제들'이 말하려 하는 희망은 결국 보편적이다. 사제는 맨발로 집 밖을 뛰쳐나온 부제에게 다가가 그가 벗어두고 나온 신발을 건넨다. 벗어선 안 될 그 소명을, 부제는 다시 신는다. 사제는 당부한다.


"사람들은 밝은 곳을 좋아하지.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이야. 그래도 우린 축복받지 않았니? 어둠을 봤으니, 의심 없이 빛을 믿을 수 있으니까. 네 안의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지 마라. 지면 안돼. 가자, 우리 더 큰 싸움을 해야 돼."


장재현 감독 '검은 사제들' 공식 포스터

장재현이라는 신성의 발견



장재현 감독은 '12번째 보조사제'를 통해 지난 2014년 제13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절대악몽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제9회 파리한국영화제에선 플라이아시아나(FlyAsiana) 최우수 단편상을 받았다. 부제 역 배우 이학주에겐 제12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단편의 얼굴상을 안겼다. 26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도 짜임새 있는 서사가 충분히 돋보였다. 구마 의식 장면은 완벽하게 시선을 압도한다.


'12번째 보조사제'는 유수의 단편영화제에서 선보인 지 불과 1년여 만에 장편화됐다. 절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단편을 접하고 장편화 가능성을 엿본 베테랑 제작자 이유진 대표(영화사 집)와의 협업은 상업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작품을 낳는 데 성공했다. 오컬트 장르의 영화로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540만여 명의 최종 관객수를 기록, 흥행사에도 족적을 남겼다. 장재현 감독은 오는 4월 개봉을 앞둔 영화 하우스 미스터리 스릴러 '시간위의 집'(감독 임대웅) 각본을 맡아 작가로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단편 히치하이킹'이 다룰 일곱 번째 영화는 윤가은 감독의 영화 '콩나물'이다. 첫 장편 '우리들'로 세계 영화계의 호평을 받았던 윤 감독이 연출을 맡고 '천재 아역'으로 불리는 김수안이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독립 단편 작업 이후 성공적 장편 데뷔를 이룬 감독의 작품'이란 공통점이다.


***'12번째 보조사제'는 그간 이학주 특별전 등 다양한 단편영화 특별 프로그램을 통해 상영된 바 있다. KBS '독립영화관'에서도 방영됐다. 한국영상자료원 도서관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온라인 상의 상시 공식 상영 경로는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숲', 아주 작은 오해의 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