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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마 Feb 22. 2019

발리 3일 차. 확신에 대한 고민

매일 쓰겠다는 확신은 없다

(번호에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하지만 여기에도 확신은 없다. 문단의 순서에는 의미가 있기도 없기도 하다. 정보 없는 발리 여행기. 2월20일에 썼다.)

 

1.    내가 처음으로 한국을 떠나 여행한 곳은 미국이었다 경험은 여행이라기보다 체류였는데엄밀히 말해 진짜 ‘체류’ 경험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번째는 일본이라 해야 옳다미국행 경유편을 타느라   환승 대기 시간을 나리타 근처의 숙소에서 보냈었다내가 지불할  있는 금액의 공간이되혼자 하룻밤을 보내기 너무 무섭지 않은 곳이면 괜찮았다일본의 비즈니스호텔이 대체로 작은 것을 그때는 모르고  가격대의 방은 이렇구나생각했다침대와 책상, TV 말고는 딱히 언급할 구성물이 없었던  방에서의 기억은 이후 미국에서의 시간보다 훨씬  생생하게 남았다시골 주택가에 조금 뜬금없이  있던 호텔은 어둡고 심심했다완벽히 방임되어있는 기분이었다나는 호텔의 시끄러운 수동 시계를 맞춰두고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침잠이 많아 늦잠을 잘 까 봐, 는 핑계였다. 그냥 그 시간이 좋았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보내는 첫날밤,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보내는 첫날밤,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혼자 보내는 첫날밤이었다.


2.     방에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라는 영화를 봤다. ‘떠난다기에 마음이 끌렸다나는 다음 여정이 어떻게 되든알람을 듣든  듣든, 어찌 되든 상관없이 있던 곳에서 떠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한 아드레날린을 느꼈던  같다해방감을 넘어서는아주 이상한일탈감이 동반해야만 느껴지는 안도감이었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안도감이나 해방감과는  거리가  결말의 이야기지만 영화를 생각하면 지금도 비좁은 호텔의 침대에 모로 누운 내 감정이 떠오른다어떤 영화는 줄거리가 아닌 시공간 안에 박제된다그건 서사를 넘어서는 인상이다나에게는 많은 영화가 그렇게 남는다그리고  기억의 과정엔 때로 어떤 논리나 인과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영화를 취재할 때 나와 가장 끈질기게 싸운 내 안의 습관은 이런 것들이었다. 발리로 향하는 동안 (항공사 버전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과 (미리 다운받아둔) 넷플릭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5화를 봤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 대한 감상처럼 내 멋대로 기억에 남을 두 콘텐츠에 대해 뭔가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20일, 스미냑의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나서던 길. 하늘이 맑았다. 발리는 지금 우기라 이렇게 맑다가도 하루 1시간여씩은 꼭 하늘이 뚫린듯한 폭우를 쏟아낸다.


3.    발리에 온 지 사흘째다첫날은 자정이 넘어 호텔에 도착했으니 걷고 먹으며 여행한 것은 이틀째가 맞다몇 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느끼지 못했다다만 혼자이니  가는 대로 걷고배가 고플  먹고고프지 않으면 굶고(아직 그런 적은 없다), 자고 싶을 때까지   있다는 사실이 여행의 질을 다르게 만든다좋기도아니기도 하다.


4.    기자를 그만두기 전까지 오래 고민했다나는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하고사람을 관찰하는 일도영화를 보는 일도무언가를 발견하는 일도 좋아한다동료들은 나를 실제의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으로 여겨주었다. 대부분 배울 점이 무수한 사람들이었다. 일에 대한 고민은 이직이나 전직 가능성 같은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그만두고 나서인지여기까지 떠나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답이 조금씩 명확해지고 있다


5.    내가 일을 그만둔 것은 나의 능력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능력의 유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을 조금  의심할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나는 너무나 확신을 얻고 싶었다확신을 얻는 일이 급해서,  근거를 밖에서 찾으려고 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도도 없이 풍경으로 알아채려 한 셈이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내가 정말로 원하던 말들을  줬다그럴  행복했다종일  말을 머릿속에서혓속에서 돌돌 굴렸다돌이켜보면 너의 글을 보았어 글에 공감하기 어려워우리 영화를 소개해줘서 고마워너의 인터뷰가 재미있었어같은 말들이 내가  일을 계속하고 싶었던 유일한 이유였다


6.    하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원망하거나 탓한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역시 많은 순간 누구의 글을 읽고 느낀 진동을 말로도 글로도 전하지 않고 침묵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기가 더 어려운 일이다확신을 얻지 못한 것을 패배라고 한다면나의 패착은 확신의 근거를 엉뚱한 곳에서 찾아 헤맸다는 점이다누가 반응하든 그렇지 않든 것을 특별히 여겨주든 그렇지 않든나의 것을 묵묵히 쌓아야 했다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다독여야 했다. 지도가 없으면 약도라도 그렸어야 했다. ‘사람은 누구나 나약하니 믿어선 안되고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으라 K교수의 말을  자주 떠올려야 했다나는 그러지 못했고다시 돌아간대도 그럴 확신이 없다내가 일을 그만둔 것은 어쩌면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결과다. 아쉬움이 있지만 그에 별 의미가 없음을 안다.


7.    그래서 나는 이제 나의 마음에 어떤 작은 자극을 주는 글이 있다면 그걸 밖에  자주 꺼내기로 했다교류에  마음을 열기로 했다 이상의영화 이상의 대화를 하기로 했다그것들을 씨앗 삼아 나와 상대를 더욱 풍요롭게 가꾸기로 했다내가 하게  일에 아주 조금이라도 그런 구석이 있다면, 이번엔  안에서 확신을 찾을  있을 것이다.

 

삼각대로 변신하는 셀카봉에게. 꼭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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