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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마 Nov 12. 2015

엄태구, 눈으로 말하는 배우

말보다 강한 눈, 그의 연기를 완성하다

그는 과묵했다. 내가 지난 삶에서 만난 모든 이들 중 가장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무슨 말이든 이끌어내야 했다. 무슨 말이든 듣고, 글로 써내야만 했다. 영화에 대해서도, 배역에 대해서도, 함께 작품을 만든 친형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연기를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도, 언제나 이렇게 말이 없는 편인지, 심지어 여전히 3g 휴대폰을 쓰는 이유가 무엇 인지까지도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대개 길지 않았다. 


그는 말보단 눈으로 말했다. 까맣고 숱 많은 속눈썹과 움푹 들어간 눈매, 마른 얼굴은 묵묵한 눈의 말에 묘한 무게를 실었다. 가만히 눈을 맞추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공감을 표했고, 가끔 매끄럽지 않은 답을 추스르면서는 듣는 내게 진심 어린 눈으로 미안함을 보냈다. 한 시간의 대화 중 꽤 잦은 침묵이 찾아왔지만 어느 순간 조바심도 불편함도 사라졌다. 길게 말을 고르는 신중함은 "낯을 많이 가린다"는 수줍음 섞인 고백과 만나 침묵을 그만의 언어로 만들어버렸다. 


2년 전 꼭 이맘 때, 영화 '잉투기' 개봉을 맞아 만났던 엄태구는 내게 이런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나는 긴 워딩이 있는 인터뷰 기사를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대화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데는 성공했다. 대화의 성공에 반드시 음성 언어들의 교환이 전제될 필요는 없었다. 다시 말해, 좋은 인터뷰엔 실패했지만 (조금 다른 유형의) 대화엔 성공했다는 뜻이다.  그때 나는 끊이지 않던 수다를 나눈 어떤 배우들과의 인터뷰보다도 말수 적은 그와의 만남이 더 정수(精髓)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 '차이나타운'(감독 한준희, 제작 폴룩스픽처스, 배급 CGV 무비꼴라쥬) 공식 스틸컷


당시에도 엄태구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충무로 신예였다. '잉투기'에 앞서 그에게 호기심을 갖게 만들었던 영화는 단편 '숲'이다. 엄태화 감독이 연출을 맡은 엄태구의 주연작으로, 지난 2012년 제11회 미쟝센단편영화제 대상(미쟝센단편영화제의 대상작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결정된다. '숲' 이후 3년 간 대상작이 나오지 않았다.)을 수상했던 화제작이기도 하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색깔의 낮고 거친 목소리, 굵직한 이목구비, 강렬했던 몇 장면들이 뇌리에 남았다.


이후 장편 독립영화 '잉투기'의 태식 역으로 영화 관계자들의 본격적인 기대를 얻기 시작했던 그는 상업영화계에서도 또렷한 활약을 이어가게 됐다. 특히 지난 봄 개봉한 한준희 감독의 영화 '차이나타운' 속 모습은 비중도 호응도 컸다. 일영(김고은 분)을 지키고 싶었던 청년 우곤 역을 맡아 누아르에 최적화된 외적 조건들을  유감없이 자랑했다. 오래도록 일영을 지켜보며 연심을 품어 온 우곤이 전형적 남자 조연 캐릭터를 벗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 배우의 공이 컸다.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에선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 분)의 수행원으로 분했다. 예상 못한 순간 극의 반전에 투입되기도 하며 시선을 붙든 인물이었다. 조태오와 맞붙은 링 위, 분노와 오기가 엉겨 붙은 그의 눈빛은 '잉투기' 속 태식을 떠올리게도 했다. 웃음기 어린 비아냥에 맹수 같은 공격성을 내비치던 '인간중독' 김 준위의 얼굴도 잊기 어렵다.


엄태구는 스크린에서도 종종 눈으로 말을 건다. 눈으로 비열해지고, 눈으로 처참해지다, 눈으로 연민을 자아낸다. 빼곡한 대사보다도 센 힘을 지닌 그의 눈빛에는 촘촘한 결이 있다. 흔히들 말하는 '눈빛 연기'로 수식하기엔 버거운 크기의 에너지다. 어쩌면 그건 내가 엄태구와 첫 인터뷰에서 느꼈던 감상의 연쇄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캐릭터를 향한 몰입을 이야기할 때, 엄태구는 꼭 자신의 일부를 떼어 인물을 완성해내는 것 같다. 


지난 4월 '차이나타운' 개봉에 앞서 그를 다시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다행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엄태구는 조금 더 많은 말을, 조금 더 쉽게 꺼낼 줄 아는 사람이 돼 있었다. (물론 여전히 과묵에 가까웠다.) 약 2년의 시간 동안 어떤 자극들이 그런 변화를 만들었는지 물었지만 역시 그는 멋쩍게 웃어 보일 뿐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눈, 그 눈은 전과 같았다. 도무지 가짜를 말하지 못할 것 같은 그 눈이 또 어떤 생을 담아낼지 늘 궁금하다. 아니, 담아낸다기보단 살아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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