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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마 Feb 27. 2019

발리 9일 차. 게으름의 내용

우붓에서 요가하기, 하루 혹은 이틀에 딱 90분 나에게만 집중했다

여행 9일 차, 엊그제 온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착 첫날 묵었던 스미냑 리조트의 풍경이 벌써 아득하게 느껴진다. 아마 공간에 대한 나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스미냑에서의 이틀과 쿠타에서의 하루 반은 우붓에서의 날들을 보다 후회 없게 만들어주기 위한 핑계 같은 여정이었다. 


3년 전 발리에서 일주일 간 여행(쿠타->우붓->짐바란 순으로 이동했다)한 경험은 각 지역에 대한 경험적 인상을 만들어주기 충분했다. 여느 동남아 여행지의 중심지와 다르지 않은 현란한 분위기의 쿠타, 마찬가지로 고급 리조트를 찾는다면 어느 휴양지에서도 받을 수 있을 짐바란에서의 서비스는 근사했지만 그게 다였다. 반면 우붓은 좋았다. 푸르고 맑았다. 여기서 마시는 들숨이 나를 더 건강하게 만들어줄 것 같았다. 조용한 '힙'함도 느껴졌다. '디지털노마드의 꿈을 이룰 수 있다면 내가 살 곳은 여기다!' 생각했다. 우붓 여행에 더 많은 날을 배분하지 않았던 것이 아쉬운 여행이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근 한 달의 여정을 모두 우붓에 몰아넣기에 나는 소심했다. 스미냑과 쿠타를 여행 시작점으로 삼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 들렀으니 됐어! 빨리 우붓으로 가자!' 뭐 그런 생각이었다. 스미냑과 쿠타에서도 나는 굳이 끌리지 않는 비치 클럽이니 서핑이니,를 대강의 계획에조차 넣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발리에 와서 바다를 본 적이 없다. 무려 쿠타에는 꼭 둘러보고 싶었던 브랜드가 있는 쇼핑몰 비치워크에 가기 위해 하루 머문 것인데, 말 그대로 '비치'워크였던 그곳에서 정말 쇼핑만 하고 나왔다.


하루 약 2만 원가량을 내며 묵은 우붓의 숙소. 아침은 무료다. 바나나 팬케이크가 일품.
정말 마음에 들었던 마당.


그렇게 우붓에 왔다. 아주 만족스러운 체류를 하고 있으면서도, 우붓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몇 줄의 문장으로 설명하긴 어렵다. 지나온 여정보다 더 많은 날을 이 곳에서 보낼 예정이니 이 체류가 마무리될 쯤엔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를 꼽으라면 그건 울창한 녹음 사이에서, 나무 사이를 아주 적절히 통과하는 햇살을 받으며, 작은 생명체들의 소리와 함께 요가를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아 보이는) 치안, 매력을 잃지 않은 골목들에 더해 이 여행지의 주인공을 기꺼이 '요가'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도시의 공기는 우붓에 더 머물고 싶게 만드는 데에 한몫한다. 우붓은 운동복을 입고 요가 매트를 들고 플립플랍을 신은 여행자들이 마치 풍경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우붓이 요가를 상품으로 삼은 여행지라는 지적도 일견 정확하다. 유명 요가원들은 요가 하수 여행자들(나를 포함해)을 위한 프로그램에 더 집중하는 인상이다.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요가와 명상, 그 과정에서의 성찰이 여행을 얼마나 꽉 차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 역시 생각해볼 일이다. 일터에서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일 년에 많지 않은 휴가를 쓰고, 그 휴가 중 떠난 여행에서 지역의 유명 관광지와 유적지, 포토스폿을 '도장깨기'하듯 둘러보는 일은 흔하다. 태생이 게을러 혼자 떠나는 여행에선 감히 그런 부지런한 코스를 짜지 못하지만, '원더뷰'를 기대하는 부모님이나 체력 좋고 에너지 넘치는 친구와 함께 하는 여행에선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었다. 


게으른 내가 관광지를 둘러보지 않는다고 해서 뭐 대단히 특별한 여행을 해왔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혼자 여행할 때 나는 아주 많은 시간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을 하곤 했다. 공간과 공기, 사람들이 다를 뿐 여행 중인 나의 상태는 금, 토, 일요일을 대개 집순이로 보내는 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럴 거면 여행 왜 갔어?'라는 질문에 '그런 게 여행이지'라고 답하는, 그게 나였다.


늦은 오후 수업을 들으면 마칠 때쯤 해가 진다.
요가하고 빈땅 먹고


내 여행은 여전히 게으르다. 그런데 우붓에서의 요가는 이 게으른 여행 속의 정수가 됐다. '게으름에 내용이 생겼다'는 표현이 어떨까 싶다. 단 세 번의 요가 수업을 들으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간의 무수한 여행들에서도 내가 꼭 해야만 했던 것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내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심지어 숨을 쉴 때에도), 무엇을 원하는지, 내 몸을 어떻게 응시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 보이는 것을 보고, 대충 맛있다고들 하는 것을 먹고, 졸리면 늦게까지 자는 그간의 여행이 나름대로 행복했지만 그 시간들이 단지 몸을 쉬게 하는 것에 그쳤다는 데에도 생각이 미쳤다. 


요가는 우붓에서 정말 별일 없이 지내고 있는 내 일상에 내용을 새겼다. 온전히 나의 몸과 마음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감사하다. 혼자 여행을 떠났던 과거, 내 감정과 기분을 해치는 존재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그 시간들에서조차 나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지 못했다. 대체 무엇을 그렇게나 의식한 것일까. 우붓에서 내가 겪고 있는 가장 큰 변화는 나에게 집중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해도 너무 많이는 흔들리지 않을, 그런 평정을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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