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디 착한 판타지, 영화의 미덕이 되다
(본문에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여자 중학생과 '내 편'을 만들고 싶어 임신을 원하게 된 유명 여배우가 있다. 예상 못한 이른 폐경을 맞이하게 된 배우 주연(김혜수 분)은 우연히 산부인과의 엘리베이터에서 중학생 단지(김현수 분)를 만난다. 앳된 얼굴로 산부인과를 오가는 단지를 겨냥해 중년 남성이 폭력적 언사를 내뱉자, 주연은 분노하며 단지를 감싼다. 영화 '굿바이 싱글'(감독 김태곤, 제작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의 두 주인공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장면이다.
마땅한 보살핌도 받지 못한 소녀, 누군가를 보살필 줄은 눈곱만큼도 모를 것 같은 안하무인 스타가 인연을 맺게 되는 동기는 각자가 겪는 '임신'과 '폐경'이라는 사건이다. 아이를 원하지만 낳을 수 없게 된 주연은 키우기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를 갖게 된 중학생 단지와 비밀 계약을 맺는다. 경제적 지원을 주는 대신, 아이를 데려오겠다는 약속이다.
'굿바이 싱글'은 지난 6월29일 개봉해 6일 만에 누적 관객수 100만 명을 넘어서며 흥행 중이다. 미성년자의 혼전임신이라는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코믹 터치로 유연하게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결말이 제시하는 인물들의 관계 역시 현실성과는 별개로 관객들의 얼굴에 미소를 띄운다.
묵직한 메시지, 가벼운 터치
'굿바이 싱글'은 코미디 장르의 법칙에 충실한 상업 영화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주변적 존재로 여겨져 온 중학생 임산부를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문제 의식을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미성년자의 임신이라는 사건을 자극적으로 이용하는 대신, 두 여성 주인공이 맺는 관계의 동기로 활용했다는 점도 그렇다.
만삭의 몸으로 미술 대회에 나간 단지가 문전박대를 당했을 때, 기자회견장 대신 대회장으로 향하며 단지의 편이 되길 자처한 주연의 대사는 계몽적으로 들릴지언정 이 영화가 말하려는 중요한 요점과 닿아있다.
청소년 국가대표로 골프 대회에 나간 생부와 미술 대회에도 출전하지 못하는 단지의 상황을 대조하며 "왜 이런 대회 하나도 못 나가게 하냐"고 외치는 주연의 대사는 특히 그렇다. 청소년기 원치 않는 임신 이후, 평범한 학교 생활과 이후의 진로 등 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포기하게 되는 쪽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것, 그 배경엔 생물학적 특성뿐 아니라 사회의 차별적 시선 역시 있다는 이야기다.
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의 부모 중 누군가의 대사도 마찬가지다. 대회장 안의 청소년들을 '순진한' 학생들로, 만삭인 단지를 그렇지 않은 아이로 구분하는 대목이다. 이는 청소년의 섹스를 소수의 일탈적 행위로 바라보며 비난할 뿐 올바른 성윤리나 피임법 등을 적절히 교육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우회적 지적이 된다.
주연과 단지의 대안 가족, 판타지의 효과
단지는 또래에 비해 빨리 철이 든 아이다. 언니와 함께 살고는 있지만, 연애에만 몰두 중인 언니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는 어렵다. 주연과 모종의 계약을 맺게 되면서 단지는 주연의 근사한 집에 머물며 태교에 힘쓴다. 그늘이 보였던 단지의 얼굴에선 종종 웃음이 피어난다.
주연 역시 간절히 원하게 된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며 단지를 보살피고, 둘은 유사 모녀 관계로 발전한다.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왔던 주연의 행동들이 이내 단지로 하여금 소외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지만 두 사람은 갈등을 딛고 관계를 보다 돈독히 다지게 된다.
영화의 결말은 유사 가족에서 대안 가족의 형태를 갖춘 주연과 단지의 삶을 그린다. 단지의 출산과 함께 결국 '엄마'가 아닌 '할머니'가 된 주연, 주연의 울타리 아래 학업의 끈을 놓지 않게 된 단지의 모습도 보인다.
주연에게도 단지에게도 여전히 '남편'은 없고, 이들의 환경은 '정상 가족'의 범주 바깥에 머문다. 통상 성인 남성의 이미지로 재현되곤 하는 '가장'의 역할은 스타의 자리에서 내려와 독립영화계에서 고군분투 중인 주연이 도맡는다. 이들의 곁엔 평구와 그의 아내(서현진 분), 오랜 시간 주연을 돌봐 준 매니지먼트사의 김대표(김용건 분), 주연의 매니저 미래(황미영 분) 등 든든한 조력자들이 있다.
주연과 단지에겐 각각 새로운 연인이 생긴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이 오로지 연인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온전한 행복을 얻는 종류의 이야기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타자가 아닌 자신의 욕망에 보다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스크린 속 두 여성의 모습에 기꺼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화가 그려낸 대안 가족의 모습은 판타지에 가깝지만, 정치적 올바름이 읽히는 이 결말은 착한 영화 '굿바이 싱글'의 정체성과도 썩 어울린다. 한 때는 결혼을 통해 가정을 꾸리길 꿈꿨던, 그리고 '내 편'을 만들기 위해 임신 스캔들까지 벌였던 주연은 결혼과 출산 없이도 해피엔딩을 맞는다.
'굿바이 싱글'은 규범 밖의 다른 삶도 행복할 수 있다고, 결혼이 '싱글'과 '굿바이'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영화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와 가정 내 성역할 담론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 영화의 결말이 반갑다. 판타지라 한들, 재단된 가치 체계의 바깥에도 행복이 있다는 따뜻한 주제의식은 분명 이 영화의 미덕이다.
(권혜림, 조이뉴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