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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aya Apr 18. 2020

[#하루한줄] 멸시로서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없다.

시지프의 신화/알베르카뮈/범우사/2011

아니, 내가 이 책에 줄까지 쳐가면서 공부를 했던가? 오래전 읽었던 책을 다시 펴본다. 내가 밑줄을 그어둔 이 곳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살은 '대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생의 의미라는 피상적 이론을 한 꺼풀 벗겨 놓고 보면, 그것은 그저 습관으로 지탱되고 있는 인생의 덧없고 하찮은 성격의 한갓 환상에 불과하다. (...) 요컨대 자살한다는 것은 '그저 바득바득 애써 살 보람이 없다는 것을 고백할 뿐이다.'


자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멜로드라마에서처럼 고백하는 일이다.(...) 다만 그것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은 이유로ㅡ그 첫째는 습관이다ㅡ 생존이 명하는 행위를 계속한다.


내가 나의 존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확실성과 이 확실성에 부여하고자 하는 내용 사이에 있는 도랑은 결코 메워질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이방인 이리라.


만약 아무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밑 없는 공허가 사물들 밑에 숨겨져 있다면, 도대체 삶이란 절망 이외의 그 무엇이란 말인가? 이 외침은 부조리의 인간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무엇이 진실인가를 찾는 것은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찾는 것은 아니다. 만약 '삶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괴로운 질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나귀처럼 환상의 장미꽃을 먹고 살아가야 한다면, 허위를 감수하느니 차라리 부조리의 정신은 두려움 없이 키르케고르의 대답, 즉 '절망'을 받아들이기를 택할 것이다. 모든 것을 잘 고찰한 확고한 영혼은 항상 이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여전히 부조리이고 그의 모순된 삶이다. 왜냐하면 이 경험의 양이 다만 우리에게 의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들 삶의 상황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단순하게 생각하여야만 한다. 같은 연수를 살아가는 두 사람에게 세상은 항상 같은 양의 경험을 준다. 이것을 의식하는 것은 우리들에 의해서다. 자기의 삶과 바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많이 느낀다는 것, 이것은 곧 사는 것이며 또한 될 수 있는 한 많이 사는 것이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돌아오는 동안이고 멈춰 있는 동안이다. 바로 바위 곁에 있는 기진맥진한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인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거운 그러나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그 끝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그의 불행과도 같이 틀림없이 되돌아오는 이 시간,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소굴로 차츰차츰 빠져 들어가는 순간마다, 그는 자기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오늘날의 노동자는 자기 생의 매일매일을 같은 일에 종사하며 그리고 그 운명은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 운명은 의식을 갖게 되는 드문 순간에 있어서만 비극적일 뿐이다. (...) 멸시로서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이디푸스도 처음에는 그것을 모르면서 운명에 복종한다. 그가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의 비극은 시작된다.


그러나 세계는 한 하나밖에 없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대지의 두 아들이다. 이들은 떼어놓을 수 없다. 행복은 부조리의 발견에서 필연적으로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부조리의 감정은 또한 행복에서 생겨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좋다고 나는 판단한다"라고 오이디푸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은 신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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