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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aya Apr 19. 2020

[#하루한줄] 이해는 언제나 비언어적이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페터회/마음산책/2005

2008년에 읽었던 책. 와. 무려 12년 전에 읽었던 책이 아직도 가끔 떠오르는 걸 보면 이 책이 정말 재밌었긴 했나 보다. 학부를 다니면서 책 읽은 것들은 별생각 없이 블로그에 기록했었는데.. 12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다시 볼 수 있다니 정말 신기하고 새롭다. 새로운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좋았던 책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읽는 것도 참 좋다. 유튜브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볼 수 있어서 관람하는 중이었는데, 콘텐츠라는 것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이 들었다. 요새 주위에서 자주 콘텐츠가 어쩌니 저쩌니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니 어쩌니.. 하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대량 생산된 콘텐츠가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콘텐츠라는 것을 만들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요새 자꾸 떠오르는 블로그 수업 광고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뿐만 아니라, 이 인터넷 공간에도 끊임없이 쓰레기를 생산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물리적/정신적 쓰레기를 그만 좀 만들었으면 한다. 결국엔 우리 인간이 피해를 보게 되니까. 지금처럼. 




우리 모두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사람이라는 맹목적 믿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과학을 믿으면서. 세상은 불가해하고, 모든 정보는 모호하다. (...)이 모든 게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을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과학의 개종자들이다. 566p


 


어떤 사람 속에는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고 관대하며 믿을 만한 개인이지만, 뼛속까지 썩어버린 상습범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어렴풋한 모습 밖에는 빛 속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 486p


 


사람들은 과도기 동안 망가져 간다. 스코레스비순에서는 겨울이 여름을 잠식해갈 때 서로 권총으로 머리를 쏘기도 했다. 일이 잘 되어가고 있을 때, 균형이 성립되었을 때 타성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얼음, 새로운 빛, 새로운 감정. 460P


 


이 순간, 세탁 건조기 앞에서 나는 그 설명할 수 없는 내 청춘의 기억, 다시는 그 달콤함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기억에 매달려 있었다. 죽음이 나쁜 것은 미래를 바꿔놓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를 기억과 함께 외로이 남겨놓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면, 기다리면서도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다림은 파괴적으로 변한다. 사물들이 미끄러 지게 놓아두면 의식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공포와 불안을 깨운다. 우울이 닥쳐오고 자멸하게 된다.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나는 자문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부분 읽을 때, 피식하고 웃었다 ㅎㅎ )


 


나는 일생 동안 지속될 것이라 여겨지는 그런 현상들에는 능하지 않다. 종신형, 결혼서약, 종신직. 그런 것들은 삶의 단편들을 고정시켜 시간의 흐름에서 면제시키려는 시도다.


 


유럽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서로 증오하면서도 의존하는, 모욕적이고 소모적이면서도 단조로운 감정적 드라마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사야를 이해하기 위해서.


 


탁자 너머로 나는 그의 턱 옆을 어루만지며 삶이 갑자기 우리에게 완벽한 타인과 함께 행복한 희열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식에 대해서 경탄했다.


 


어떤 순간이 되면 이해가 찾아온다. 이해는 언제나 비언어적이다. 무엇이 낯선 것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설명하려는 충동을 잃어버린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그 현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쓰레기통 같은 기분이 든다.


 


내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순간도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의 어떤 것도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통로가 될 수는 없다. 마치 남겨놓고 가는 유일한 것인 양 매 걸음을 떼어야 한다.


 


그럼 갈망에 대한 수학적 표현이 뭐지 아세요? 음수에요. 뭔가 잃어버리고 있다는 감정의 공식화. 인간 의식은 더욱더 확장하고 아이들은 그 사이의 공간을 발견하죠. 돌 사이, 사람들 사이, 그리고 숫자 사이. 정수에 분수를 더하면 유리수가 돼요. 인간 의식은 거기서 멈추지 않죠. 이성을 넘어서고 싶어 하죠. 인간 의식은 제곱근을 풀어내는 것 같은 기묘한 연산을 더 하게 돼요. 그럼 무리수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시계를 도구로 삼아 서로의 삶을 묶는다. 약간의 변화라도 일으키면, 거의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 일어난다.


 


널리 알려진 생각으로는 아이들의 마음은 열려 있고, 진정한 내적 자아는 밖으로 저절로 스며 나온다고 한다. 그런 말은 죄다 틀렸다. 아이보다 더 비밀스러운 사람은 없으며, 아이보다 더 절실하게 비밀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도 없다. 그것은 항상 아이들을 깡통 따개로 따서 안에 뭐가 들어 있나 보면서 그 안을 더 쓸모 있는 잼으로 바꿔줘야 하는 게 아닌가 궁금해하는 세상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린란드에는 여자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죽음과 필요성에 의해서 각각 다른 성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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