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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게요 Mar 17. 2024

가면이 모자란 사람

이게 난데, 어쩌겠어.

아이가 생긴 이후 새로운 인간관계는 주로 아이 친구 엄마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난 친구들에게 '아이 친구 엄마' 노잼을 자주 호소하고 있다. 아이 친구 엄마는 내가 선택하는 인간관계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 친구 엄마...(아친엄이라고 줄여도 될까?)는 학창시절에 같은 반 친구 같다. 공통의 환경을 공유하고 있지만, 내 선택으로 함께 있는 것은 아니고 또 모른 척하기엔 같은 반이 되어버린 그런 상태랄까.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학창시절 내내 유잼이라고 느낀 친구가 몇 없었고, 소수의 유잼 친구랑만 가까웠던 심지어 중학교땐 학원 친구들하고만 놀았던 아싸가 아닌가.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고 보니 같은 과 친구들은 모두 유잼이었고, 나는 갑작스런 인싸 대학생활을 했었다. 그후 씨네필 흉내와 출판사 근무로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고 산지 십년이 넘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게 인간관계의 모두인줄 알고 흥청망청 지내다 갑작스럽게 애엄마라는 것말곤 공통점이 없는 나와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아친엄과 갑작스레 한 반이 되어버린 것이다.


요즘 아이를 낳는 사람은 10명 중 9명이 중산층이라는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결혼이 필수가 전혀 아니고 사치스러운 선택 내지는 일부만 지켜나가고 있는 전통 의식 같은 게 되어버린 요즘. 출산은 말해 무엇한가. 그래서 나는 지금 팟캐스트 비혼세를 듣는 학부모가 되어있단 말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하면 결국 아친엄이랑 나랑 안맞는다는 소리다... 난 열명 중 한명이란 거다.


작년에 이사를 했다. 영끌이 시대의 키워드였던 그때 함께 살짝 정신을 놓고 집을 사버려서, 지금 빚더미에 앉은 청년(39살까지 청년이래요!)이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여기서 만난 아친엄들은 나랑 나이가 비슷하다. 처음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빵빵 웃어주는 엄마들이 있어, 오 나도 늙어서 이제 평범한 유머코드를 갖게 된 줄 알았다. 하지만 잡담을 하다가도 이건 아닌데 싶은 대화들이 길게 이어지고(그러니까 마카롱집 사장이 손님이랑 불륜을 저질러서 문을 닫았다더라, 얼굴을 보러 가자 같은) 나는 가끔은 반대의견을 내기도 하고 못들은 척도 하며 만남을 계속해 오다가 친구들을 만나면 아친엄 뒷담화를 하고 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와 그들이 다르다는 것이 사실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게 뒷담화할 건덕지가 있냐는 말이다. 그러한 현타와 노잼과 이건 아닌데 속을 헤매이다 친구의 답에 알게 되었다. 내가 모든 관계에서 바라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 모두가 나처럼 상대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며 친목을 다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친구가 자긴 모임마다 기대하는 것이 다르다는 얘기를 꺼낸 것이다. 이렇게 자기 밑바닥까지 까보이며 대화를 하는 사람은 여기밖에 없다며. 다른 모임에서는 다른 이야기만 주로 한다는 거다.


나는 어디에서나 너무 나였고, 나는 나를 다 까보이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상대가 나와 비슷하게 자신을 내보이지 않거나 쿠션어를 잔뜩 넣어 말하면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갱상도 K장녀) 알맹이 없는 누구와도 할 법한 대화를 하는 것은 지루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알맹이 없는 대화를 하는 사람과 자신을 내보이는 대화를 하는 사람을 구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모두와 같은 수준의 만남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니라는것을 알고 있는 거였다. 나만 가까워지려면 속마음을 다 이야기해야한다고 생각했고, 누구와도 할 수 있는 대화는 하나마나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사실 그것이 사회 생활임을, 그것이 성인의 자세임을 내가 몰랐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모임마다 다른 가면을 쓰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난 가면없다며 자신있게 이게 내 맨얼굴이라는 걸 알리는 건 미덕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았다고 내가 달라졌냐하면 그건 아니다. 난 사회적 이슈와 문화 얘기와 내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제일 재밌고, 가면쓰기는 20분 이내의 만남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가면이 보편적인 것을 알게 되어서 큰 기대는 내려놓게 되었달까. 내가 노잼이라 생각한 사람들도 어딘가에선 자신을 내려놓는 만남을 하겠지. 나랑 유잼이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겠지. 곧 마흔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자신에 대해 깨달아가는 게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나에 대해 아주 많이 생각하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한가지 더 알아가는 게 있다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은 것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가면을 쓰고 오래 만나오면 그 가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가면 쓴 상태로 그럭저럭 편한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면도 내 맨얼굴을 그러려니 해주기도 하더라는 거다. 결국 만남은 상대를 재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인가 보다. 이제 나랑 꼭 맞는 친구 찾기는 내 욕심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맨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관계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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