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이 Nov 20. 2022

소통이라는 신비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 1] 정리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 가라타니는 이미, 산업자본의 차익 실현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노동 착취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 체계의 사이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이해하면 ‘사다’와 ‘팔다’는 같은 행위가 아니게 된다. 상품과 화폐의 교환은 등가교환이 아닌 것이다. 실은 둘의 가치가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환은 성립하고 만다. 그것이 진짜 신비다. 그런데 경제학은 그러한 현실의 신비를 은폐시킨다. 경제학은 그 둘의 교환이 등가교환이라 말하고, 판매와 구매가 등치라 말한다. 그렇다면 가라타니는 [탐구 1]에서 또 같은 얘기를 하려는 걸까. 아니다. 이번엔 경제 이야기가 아니다. 경제는 언어와 철학으로 넘어가기 위한 디딤돌일 뿐이다. 이번에 마르크스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다시 ‘사다’와 ‘팔다’가 같지 않다는 얘기부터 시작하자. 여기서 단연코 불리한 입장은 파는 쪽이다. 돈을 가진 자가 우위에 있는 법이다. 해당 상품이 팔리면 이익을 보겠지만, 팔리지 않으면 손해다. 그러므로 상품을 가진 자는 어떻게든 팔고 싶어하지만, 사는 쪽에선 꼭 구매 행위를 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신중해진다. 주변을 보면 사고 파는 행위가 늘상 일어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착시다. 판매가 물 흐르듯 늘 일어난다면 누가 망하겠는가. 판매는 예측 불가능하며 따라서 절박한 소망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고 파는 비대칭적 관계에서만 ‘가치’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저것을 언어에 대입해 보자. 우리는 언어의 의미가 말하고 듣는 행위에서 발생한다고 여기지만, ‘말하다’ ‘듣다’는 사고 파는 행위처럼 비대칭적 관계가 아니다. ‘쓰다’ ‘읽다’ 또한 마찬가지다. 매체의 차이일 뿐 두 관계는 모두 동일한 체계 안에서 벌어지는 언어 게임에 불과하다. 따라서 거기서는 의미가 발생할 수 없다. 가령, “how are you”에 대해 “I am fine thank you, and you?”라고 답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거기엔 다만 약속된 규칙과 그것을 따르는 충실성만 존재할 뿐이다.


언어에서 사고 파는 것과 같은 레벨은 ‘가르치다’ ‘배우다’에 해당한다.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은 같은 규칙/게임을 공유하는 사이가 아니다. 서로 다른 규칙 체계 위에 서 있기에 자신의 것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여기서도 가르치는 쪽이 불리한 입장이다. 가르치는 쪽이 굳이 상대에게 자신의 규칙 체계를 알려주려는 것은, 자신의 상태를 상대에게 표현하거나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르치는 쪽은 사실 가르침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은 서로 공통분모가 없기 때문에 둘 사이의 소통에는 괴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둘 사이에 교집합이 있다는 건 둘이 같은 규칙 체계를 공유한다는 걸 뜻하므로 애초에 가르칠 필요가 없어진다. 따라서 판매가 불확실한 소망이듯, 가르침 또한 마찬가지 행위다.


모든 판매와 모든 가르침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한 사건이며, 판매 전체 또는 가르침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법칙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판매가 될지 안 될지, 가르침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예측할 수 없으며 대부분 성사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품의 가치, 언어의 의미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절대값이라 여기지만, 그것은 오해다. 상품 가치는 판매되는 그 순간에, 언어의 의미는 가르쳐지는 그 순간에만 성립하는 순간적이고 우발적인 값이다. 우린 다만 그것들을 사후적으로/귀납적으로 되돌아보며 성립 가능한 법칙을 만들고 증명하며 합리화할 뿐이다.


저 대목에서 소쉬르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갈라선다. 소쉬르도 비트겐슈타인도 모두 자신의 생각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 체스 같은 게임을 예로 든다. 하지만 그 둘의 의도는 정반대다. 소쉬르는 규칙을 공유하기 때문에 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똑같은 놀이판, 똑같은 말을 가지고 한 사람은 바둑을, 다른 사람은 오목을 둔다면 둘 사이에 게임이 성립하지 않듯, 언어 또한 서로 다른 규칙 체계를 가진 두 사람 사이에선 소통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같은 게임을 두 사람이 하듯, 소통이란 같은 규칙 체계(=랑그)를 공유하는 언어게임이라고 소쉬르는 제안했다.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생각이 사후적 판단이라 여겼다. 우리는 바둑의 규칙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한국어의 문법을 알고 있는가. 사실 완전히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 보드게임 카페에 왔다고 치자. 해당 게임을 전혀 모르는 친구와 그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친구에게 게임의 룰을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다. 다만 처음 몇 판은 시범 삼아 게임을 경험시킴으로써 룰을 체득하게 할 뿐이다. 문법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문장이 어색하다거나 틀렸다는 것을 직감할 순 있지만 그게 왜 어떻게 틀렸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바둑도 마찬가지다. 교본에 나오는 범례적인 수들은 있지만 그것이 곧 바둑의 규칙은 아니며 그 수가 완벽한 방법인 것도 아니다. 그 수는 조만간 수정/보완될 가능성이 높으며 혹은 폐기될 수도 있다. 더 좋은 수는 언제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바둑의 수는 앞으로 무궁무진하게 개발될 것이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완벽한 문법이 존재해서 그 틀에 맞아떨어지는 문장과 용법만 폐쇄적으로 쓰이지 않는다. 말해지는 매 순간 문법과 용법은 달라지고 사라지고 새로 생긴다. 우리는 언어를 쓸 때마다 문법을 지키지만 한편으론 기존 문법을 파괴하고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상품을 사고 파는 행위처럼, 언어 생활에서도 소통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소통은 하나의 정해진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게 아니라 매 순간 단독적으로 벌어지는 독립적 수행이라고 보았다.


가라타니는 서로 다른 규칙 위에 선 존재자들을 평행선에 비유한다. 평행선은 결코 만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규칙을 지닌 자들 사이에 소통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클리드 공간을 전제했을 때의 이야기다. 세상이 유클리드 공간이 아니라 비유클리드 공간이라면 평행선은 세상 어딘가에서 무한히 만난다.(마침 아인슈타인이 우주는 유클리드 공간이 아니라 비유클리드 공간임을 밝혔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규칙을 지닌 자들끼리도 무수히 소통할 수 있는 시점이 존재한다.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한 것은 칸토어나 화이트헤드, 러셀과 같은 세계관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유클리드적 세계를 벗어날 때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또한 난센스가 될 것이다. 마치 수학에 가무한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기존 수학 체계가 난센스가 돼버린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 개념을 시중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화용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완전한 오독이다. 화용론은 소쉬르의 언어게임과 같은 맥락이다. 화용론은 같은 규칙 체계를 공유하는 자들 사이에서나 성립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언어란 각자가 다른 규칙 체계를 가졌기 때문에 완전히 겹쳐지지 않는 무언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전 지구인이 모두 동의하는 ‘사랑’을 정의할 수 없다. 그 어떤 단어도 마찬가지다. 우리 각자는 저마다 조금씩 어긋난 개념 정의를 상정하고 있다. 다행히 각자가 생각하는 사랑이 모두 다를지언정, 그것들이 완전히 달라서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지경은 아니다. 각각의 사랑은 교집합이 더 넓고 친연성이 매우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유사성’이라 일컫는다. 결과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이 가족 유사성 개념으로 말하고자 한 바는, 서로 다른 규칙 체계를 지닌 자들, 서로 다른 공동체에 속한 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야말로 ‘소통’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잠정적 결론이다.


그를 통해 가라타니는, 그동안의 철학은 소통이 아니라 모놀로그였다고 비판한다. 플라톤의 대화도 실은 자기독백에 그치며, 칸트도 헤겔도 후설도 하이데거 등도 모두 하나의 규칙 체계, 하나의 공동체를 상정하고 그 안에서 논의를 쌓아올린 독아론이라고 말이다. 거기에 진정한 ‘타자’는 없다. 나와 다른 규칙 체계를 가진 자들을 배제하는 것. 혹은 그들 나의 규칙 체계 안으로 강제로 포섭시켜 나를 중심으로 그들을 이해하는 것. 그런 철학으로는 세계를 똑바로 직시할 수 없다.


이 순간 가라타니의 앞으로의 과제는, 평행선을 교차시키는 비유클리드 공간이란 게 사상에서는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구현 가능한지에 관한 논의가 될 것 같다. 그의 논의는 이제 겨우 시작인지도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