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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Dec 03. 2022

진화론과 창조론을 넘어

가라타니 고진의 [은유로서의 건축] 요약

1.

가라타니 고진은 서양철학이라는 구태를 극복할 가능성을 마르크스(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찾고자 한다. 이 책에서는 주로 마르크스에 초점을 맞추고, 비트겐슈타인은 다음 저서인 [탐구] 시리즈에서 중점적으로 다룬다.


가라타니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진짜 업적은 ‘타자’를 녹여 없애버리는 서양철학의 사유 양식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 있다. 마르크스는 ‘세속적 타자’를 도입하는데, 세속성이야말로 어떠한 절대적 관념으로도 결코 녹여 없앨 수 없다.


2500년 서양철학의 역사는 ‘생성’과 ‘제작’의 대립으로 읽을 수도 있다. 생성이란, 세계가 스스로 형성되고 변해간다는 입장이고, 제작이란, 누군가가 세계를 만들었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의미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생성 측은 세계 그 자체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며, 반대로 제작 측은 세계를 만든 이의 의도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헤라클레이토스부터 데모크리토스까지 고대 희랍 철학자들과 아테네의 기존 소피스트들을 생성의 입장으로 이해한다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제작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말 포스트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해체주의 철학까지도 양측 대결구도의 변주로 읽힌다. 19세기 이후 생물학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구도로 본격화되기도 했다.


매 시기마다 철학적 전복이 있었지만, 그 시도들은 늘 어느 한 쪽을 패배시키고 다른 쪽의 손을 들어주는 양상이었다. 그러므로 철학에 역사는 없으며 지금까지 똑같은 전복의 헛된 반복만 계속해 왔다. 데리다나 들뢰즈 등이 서양철학을 완전 찢어발긴 것처럼 평가되었던 적도 있지만 실은 그들의 세계관 또한 서양철학의 자장 안에 있었다.



2.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생성’도 ‘제작’도 정답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알아보자. 우선 생성의 오류를 정확히 지적한 건 괴델이었다. 불완전성 정리. 괴델에 의하면 수학의 진리성은 수학 그 자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수학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다. 그러한 성질을 후에 데리다는 ‘결정 불가능성’이라 부른다.


괴델처럼 생각하면, 고전 경제학도(+마르크스 경제학도), 기존의 언어학도,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도, 후설의 현상학도, 하이데거의 존재론도, 모두 ‘결정 불가능성’에 처한다. 경제학은 상품 본연의 가치를 설명하기는커녕 은폐시키고, 언어학은 언어의 본질을 은폐시킨다. 레비스트로스는 ‘근친 상간 금지’를 중심으로 구조주의 이론을 쌓아올렸다. 그는 ‘근친 상간’을 금지하는 이유를 역사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설명한 기존의 해석틀을 모두 거부하고, ‘근친 상간’을 오직 형식을 위한 논리 장치로 간주했다. 그런데 그렇게 간주하면 ‘근친 상간’ 그 자체는 논리적으로 그 토대를 증명할 수 없는 ‘결정 불가능성’이 되어버린다.


하이데거 또한 괴델과 같은 논리로 후설의 현상학을 비판하고 돌아섰다. 애초에 후설의 문제의식은 칸트와 같은 것이었다. 칸트의 문제의식은 이성의 월권을 워워 시키는 것이었다. 칸트 이전 철학에서 이성은 마치 모든 문제를 다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칸트는 이성으로는 결코 물자체를 파악하거나 물자체의 존재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물론 칸트는 이성 아니라 인간의 어떤 능력으로도 불가능하다고 결론 지었다만..)


후설의 문제의식은 수학의 월권을 막고 수학과 철학의 역할분담을 구분 짓는 것이었다. 후설이 내린 결론은, 형상의 존재론적 특성을 밝히는 것을 수학은 할 수 없고 철학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칸트처럼 후설 또한 세계의 특성은 세계 자체에서 발생하지 않고 인간의 의식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의식 자체는 그 근거를 증명할 수 없는 ‘결정 불가능성’에 처하고 만다. 그것이 하이데거의 비판이었다.


일반적으로 형식주의자들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해, 존재와 존재자는 메타 레벨과 대상 레벨이라는 이항대립의 동어반복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정작 하이데거의 의도는 그러한 형식주의자들에게 메타/대상 레벨의 구분이 일종의 형이상학적 도피임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메타 레발과 대상 레벨을 구분 짓는 본질적 기준이 어디서 형성되냐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하이데거의 존재자들은 단일 체계에 속하는 게 되고 만다. 단일 체계 속 존재자들이 그 존재 근거를 상실해 버리는 결말은 앞에서 구구절절 말한 그대로다.


데리다는 하이데거를 필두로 한 그간의 철학을 이렇게 비판한다. 인간(=존재자)이 말하는 입장과 그 자신의 말을 듣는 입장 사이에는 틈이 존재하는데, 서양철학은 그 틈을 은폐시켜 왔다고 말이다. 우리는 말할 때의 의도와 자신의 말의 의미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말은 의도대로 뱉어지지 않으며, 그것이 나의 말이더라도 그것을 내가 다시 들은 다음에야 1차적인 의미가 결정된다. 의도와 의미 사이엔 반드시 괴리가 존재한다. 데리다는 그 괴리야말로 주체의 가능성이라 말한다.


위와 같은 데리다의 철학 비판은, 괴델의 전략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데리다의 주체 또한 ‘결정 불가능성’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데, 안쓰러운 건 ‘결정 불가능성’이란 개념을 제시한 사람 또한 데리다였다는 점이다. 데리다의 이론은 2중으로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 셈이다.


‘제작’의 관점이 오류임은 방금 데리다가 보여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의도대로 발화할 수 없으며 전달은 더더욱 요원하다. 그런데 데리다보다 먼저 같은 말을 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폴 발레리다. 발레리는 시의 의미는 완전히 시인에게서 나온다고 보지 않았다. 시인보다는 언어 자체에서 더 많은 의미가 도출된다. 그런데 언어 자체는 시인이 만든 게 아니다. 그러므로 시의 의미는 시인보다 언어 자체에 더 많이 빚진다. 시뿐 아니라 인간이 만드는 모든 게 마찬가지다.


가라타니는 그것을 도시에서도 증명하고자 하는데, 가령 도시공학자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자연도시와 인공도시를 비교하며 역사적으로 인공도시가 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인간이 만들어내는 의미의 단순함에서 찾는다. 자연도시의 구성적 양상이 훨씬 복잡한 반면 인공도시는 그에 비해 너무 단순하다. 그 결과 인공도시는 늘 황폐해지는 결말을 피하지 못한다.


그로써 가라타니는 ‘생성’도 ‘제작’도 세계 의미의 본질적 위상과 근거를 제시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쩔 것인가.



3.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처음 발표했을 때 수학자들은 깜짝 놀라다 못해 절망했다. 수학은 이제 끝인가 하고. 그런데 가라타니 고진은 오히려 괴델에게서 새로운 전망과 가능성을 읽어낸다. 가라타니는 괴델이 수학을 파괴한 게 아니라 오히려 수학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한다. 괴델 덕분에 수학은 더 이상 정합적인 척, 진리인 척, 논리적인 척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괴델 스스로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학이 하나의 정합적인 통합 체계라고 여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수학의 어떤 부분은 현실을 반영하는 반면, 다른 부분은 현실과 전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사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다룬 건 후자였다. 괴델의 말마따나 현실과 무관한 그 자체로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수학의 세계는 ‘결정 불가능’하며 그 자체로 스스로의 체계를 확장/발전시킬 수 없다. 자기 복제/자기 참조/자기 지시로는 새로움을 만들어낼 수 없다.


수학이 지금까지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전자의 영역 덕분이다. 현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영역의 수학은 그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움을 발명해왔다. 가령 고대 이집트에서는 원의 원주율이 대략 3.14임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물론 플라톤은 그딴 건 수학이 아니라고 단칼에 잘라냈지만, 저것이 수학이 아니라면 무엇이 수학이란 말인가. 그처럼, 수학은 하나의 단일 체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체계들의 교차임을 알 수 있다.


가라타니는 그것이 단지 수학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철학도 경제학도 언어학도 심리학도 모두 세계를 하나의 단일 체계라고 전제하는데, 그 전제부터 이미 글러먹었다는 게 그의 진의다. 세계는 하나의 단일 체계가 아니라 무한한 서로 다른 체계의 폴리포닉이다. 마르크스가 애초에 말하고자 한 점이 바로 저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생각한 세계는, 분업과 교통의 역동적이고 우연한 산물이었다. 그랬던 걸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납작한 폐쇄계로 축소시킨 게 엥겔스였다. 그리고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엥겔스의 세계관을 마르크스 철학이라 착각했고 말이다.


허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역사를 하나의 이야기로 보는 관점, 헤겔의 가이스트 개념, 철학자가 자신을 자율적이라 여기는 것,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보는 관점 등은 모두 분업의 부산물이다. 계급투쟁 또한 규정할 수 없는 무수한 다양체들의 축의 무질서한 교차다. 그랬던 것을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같은 하나의 담론 축으로 일원화한 것이 엥겔스였다. 마르크스 철학을 하부구조에 대한 상부구조라는 식의 유물론으로 해석한 것 또한 엥겔스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란 종교와 같은 하나의 가상이었다. 마찬가지로 그것의 비판적 대안인 공산주의 또한 가상일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이 실은 종교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었듯, 우리의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도 공산주의를 필요로 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될 것이다. 그 비판은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실천적으로만 가능하다.


그 근거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론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에 관해서는 [탐구 1]을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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