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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ul 08. 2024

모든 걸 다 기억하면 똑똑한 걸까?

추상화 능력으로 따져보는 문해력

매년 12월은 쓸쓸하고 아쉽다. 연말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중3들이 이제 학원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12월 말 마지막 수업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뭐냐 물었다. 한 학생이 [동양철학 에세이 1]이라고 답했다. 그냥 립서비스가 아니라, 그 책에서 명가 사상이 진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 학생이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명가 사상이란 들어보니 바로 공손룡의 가르침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춘추시대에는 말을 타고 다른 나라로 이동할 경우 국경에서 요금을 내야 했다(걸어가면 요금을 안 냈다). 지금으로 치면 고속도로 톨비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한 번은 공손룡이 말을 타고 옆나라로 이동하는데 관리가 요금을 내라며 세웠다. 공손룡은 자신이 타고 있는 것은 '말'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총 5개의 논증을 펼쳤다는데, 여기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자신의 말이 '말'이 아니라는 공손룡의 세계관이 중요하다.


'말'이라는 단어는 세상 모든 말들의, 과거는 물론 앞으로 태어날 모든 말들까지 포함해 그것들의 특성을 추출하여 평균화한 의미를 지녔다. '말'뿐 아니라 모든 단어가 다 그렇다. 그러므로 공손룡은 아마 스스로를 '사람'이라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은 '사람'이 아니라 '공손룡'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라고 역정을 낼 때, 말하는 이가 의미하는 '사람'의 의미는, 그가 생각하는 평균적인 사람과 이상적인 사람의 혼종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러한 역정은 정당한가, 하고 공손룡은 묻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사람이 역정을 내는 이유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의 바운더리와,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람의 행실 사이에 괴리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머릿속에 든 생각과, 현실에 살아있는 실제 사람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당연히 실제 사람이다.


공손룡의 의도는, 언어야말로 세상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여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자식이 엄마에게 "엄마가 그러고도 우리 엄마야?"라고 소리 지를 때나, 연인에게 "니가 그러고도 내 여친이냐?"라고 화낼 때, 그들은 자신의 뇌피셜과 현실 속 인간의 괴리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의 소수자 혐오와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이란 자고로 이성애를 하는 게 자연의 이치인데 동성애라니? 정상적인 사람은 사지가 멀쩡해야 하는데 장애가 있는 병신이라니? 하지만 엄연히 우리 눈앞엔 성소수자도 있고 장애인도 있다. 그렇다면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하겠는가.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의 의미를 기준으로 현실을 바꾸려 하는 게 맞을까, 현실을 기준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의 의미를 바꾸는 게 맞을까.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떠올랐다. 푸네스는 모든 사물을 다 기억하는 능력을 지닌 반면 추상화 능력이 결여된 인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무에 달린 모든 나뭇잎을 '나뭇잎'이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부르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보기에 각각의 잎들은 저마다 다 모양과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왜 한데 묶어 '잎'이라 부르는지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손룡이라면 푸네스야말로 최고의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인간들이 모두 푸네스처럼 된다면 좋을까. 회의적이다. 이것이 언어의 한계이자 가능성 아닐까. 인간은 비슷한 것들을 뭉뚱그려 하나의 단어로 지칭하기에 그 개별적인 개체에 대한 이해도는 떨어진다. 반면 그렇게 하지 않고 모든 대상에 다 이름을 붙일 경우 오해 없는 소통은 가능할지 몰라도 고도의 추상적이고 수준 높은 논의는 불가능해진다.


그 학생에게 푸네스 이야기를 못해주고 수업을 끝마친 게 영 찜찜하다.


(위 글은 제 책 [문해력을 문해하다]의 일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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