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영을 기리며
‘四面楚歌’
초나라 항우의 군대가 유방이 지휘하는 한나라에게 포위되었을 때, 사방에서 들려오는 한나라의 노래 속에 초나라의 노래가 섞여있어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초나라가 한나라에게 이미 복속된 줄 알았던 항우는 그것을 한탄했다는 데서 유래한 얘기입니다.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지만
時不利兮骓不逝 시세가 불리하니 추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骓不逝兮可奈何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虞兮虞兮奈若何 우희여, 우희여! 너를 어찌해야 하는가.
-항우의 해하가(垓下歌)-
漢兵已略地 한나라 병사가 이미 점령을 했는지,
四面楚歌聲 사방에서 초나라 노랫소리 들리네.
大王意氣盡 대왕께서 의기가 다했으니,
賤妾何聊生 천첩인들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우희의 답항왕가(答項王歌)-
한나라의 건국 역사를 기록한 ‘楚漢志’에는 애첩 우희와 함께 궁지에 몰리게 된 항우가 읊었던 해하가와 비장한 그들의 최후가 담겨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1918년에 완성된 경극 ‘패왕별희’에는 그 구절이 대사와 함께 노래로 첨부되어 있습니다.
영화 ‘패왕별희’는 경극이 대중에게 가장 사랑을 받았던 시기인 1924년부터의 이야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중국은 중일전쟁과 장개석을 필두로 한 국민당의 득세, 그리고 다시 공산당의 해방운동과 문화 혁명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1993년, 첸 카이거 감독의 작품인 ‘覇王別姬’
장국영과 장풍의, 공리 등 걸출한 배우들의 빼어나고 섬세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영화 중 한 작품입니다.
군벌들이 정권을 잡고 있던 1925년,
어린 나이의 두지(장국영 분)와 시투(장풍의 분)는 경극단에서 함께 성장합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고된 예인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기본적인 경극 교육을 마치자 스승은 그들에게 ‘패왕별희’를 가르치고,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두지에게는 우희역을, 남자다운 시투에게는 패왕역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두지는 경극에서 우희가 부르는 노래에 대한 불만으로 가사를 개사하다가 스승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게 됩니다.
사부와 시투의 강압에 남자의 정체성을 잃어가게 되는 두지...
결국 자신이 살아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일본의 침략을 받던 1937년.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경극배우로 성장한 데이(두지)와 샬루(시투)를 조명합니다.
서로의 이름까지 개명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던 둘이지만, 남 몰래 샬루를 사랑하던 데이는 샬루가 홍등가 1급 창녀 주샨(공리)과 사랑에 빠지자 크게 상심하게 됩니다.
이후 샬루의 결혼과 데이의 질투로 잦은 다툼을 벌이게 되면서 조금씩 멀어지게 됩니다.
깊은 고독과 배신감에 아편에까지 손을 대게 되는 데이는 일본군이 물러간 뒤 일본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는 죄로 기소되며 위기에 몰리게 됩니다. 여성보다 아름다운 데이의 연기에 탄복한 국민당 장교 덕분에 경우 풀려나긴 했지만, 데이와 두안의 사이는 이미 너무도 멀어져 버리게 됩니다.
영화 중반 주샨의 등장으로 관계적인 대립이 이루어진다고 하면, 후반부로 가게 되면 시대 상황과 아울러 서로 대립을 하게 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데이의 그런 맘을 아는 샬루.
항상 샬루는 마음속에 데이를 생각하고 있지만 주변 상황과 인물들 속에 의도치 않게 데이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 상황들은 동성애라는 편견을 떠나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장면으로 문화혁명의 불길이 치솟는 환경 속에서 샤오 시가 이끄는 홍위병들에게 심문당하는 데이와 샬루의 자아 비판.
이성을 잃은 샬루는 데이의 동성애를 폭로하고, 데이는 창녀였던 주샨의 과거를 폭로하면서 서로에게 더 이상은 없음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샬루는 한 번도 주샨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증언을 하게 됩니다.
두안에게 사임한 주샨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고, 경극이라는 운명 앞에 좋든 싫든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데이와 샬루는 서로의 살을 찢는 고통 끝에 경극학교 시절의 두지와 시투로 돌아와 마지막 공연을 준비하게 됩니다.
일제의 중국 침략과 국민당의 집권, 공산당의 승리 등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극배우의 삶은 현실의 상황을 수용해야 했습니다. 경극은 흥망성쇠를 겪다가 문화혁명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았고 그런 과정들 속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은 주변의 배신도 엮이게 됩니다.
경극배우로서 격동의 시대 속에서도 무조건 연기를 해야 했던 두 남자.
본의와 상관없이 친일파가 되어야만 했고, 국민당을 지지해야 했으며, 공산당의 법도를 따라야 했고, 그들을 위해 경극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게 경극배우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법이었습니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왔던 藝人들은 시대의 권력과 사상 앞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배운 것은 지식이나 문자가 아닌 기예였기 때문입니다.
예인의 절개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기예를 사람들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보여주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시대의 숙청은 너무도 가혹했음이 분명합니다.
데이(두지). 남자이지만 여성의 이미지가 지배적인 캐릭터입니다. 이 영화가 퀴어적(게이) 요소가 짙은 이유는 바로 데이라는 캐릭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패왕별희를 배우며 우희역을 해온 그는 정체성이 모호합니다. 말투나 행동에서도 남자가 아닌 여자임을 느낄 수 있으며 살아온 삶이 그의 여성성을 더 뚜렷하게 만들어서 강하게 표출되게 됩니다. 샬루에게는 우정을 넘어선 사랑의 감정을 보여주고, 주샨에게는 샬루에 대한 그녀의 지극한 사랑 때문에 강렬한 질투의 감정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미묘한 갈등을 지속적으로 이어갑니다.
샬루(시투). 데이와는 반대로 남성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등지고 실망감을 주는 캐릭터입니다. 데이와 샬루의 대립, 시대환경에서 오는 고통에 그대로 노출된 캐릭터이며 그 시대를 대변하는 일반적인 인물을 표현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샨. 창녀 출신임에도 샬루의 아내가 되어서 지혜롭고 당당한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샬루를 지극히 사랑하고 극 속에서 데이와 대립하며 혼란의 시대에서 샬루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 투철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샬루에 대한 실망에 삶을 져버릴 정도로 순수한 사랑을 했으며 샬루가 그녀 인생의 전부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지와 시투, 데이와 샬루, 혹은 우희와 패왕으로 살아가는 그들.
현실과 경극 사이에 놓인 세계를 지배하는 늘 새로운 세력은 두지의 정체성을 거세시키고, 때로는 그런 우희에게 열광하며 또 때로는 그런 데이에게 조롱을 퍼붓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을 때마다 사면초가에 빠지게 되는 두 사람의 인생은 그 자체가 바로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 경극 자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영화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조계평의 스코어 속에서 어우러지는 북과 박판, 그리고 호궁과 애끓는 횡적의 멜로디는 그들의 현실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울려 퍼지는 경극의 배경음악이었습니다. 자신을 지켜주는 시투에게 애틋한 정을 느끼는 식정의 피리 속리 뒤로 이어지는 징과 박판의 격렬함.
주샨에게 샬로를 빼앗긴 데이가 거울을 보며 탄식할 때, 일본군 앞에서 노래를 부른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흐르던 날카로운 쇄납소리, 문화혁명의 소용돌이 앞에서도 사랑을 쫓고 또 부정하는 세 사람의 기구한 인연을 노래하는 서글픈 현의 울림 등은 패왕별희가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와 어우러진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과 배신, 질투와 좌절 그리고 아픔과 용서의 순간을 차례로 맞이하며 오직 두 사람을 비추는 앵글에 의지해 마주 선 두 사람. 샬로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 옛날, 잘못되어진 노래의 한 구절을 다시 읊어봅니다.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서, 계집아이도 아닌데....’
장국영 최고의 유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모든 배우들의 연기와 더불어 첸 카이거 감독이 빚어낸 장면 하나 하나마다 최고의 찬사를 받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입니다.
격동하는 대륙 안에서 혼란스러운 사람들과 수많은 악조건 속에 내던져진 불안한 사회상을 그려내기까지... 확실히 중국을 대표할만한 시대극으로 길이 남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미 이 영화를 보셨을 분들이 많으실 터, 오랜만에 추억을 불러봄이 어떨지 생각해봅니다. 성월동화, 퀴어영화인 해피투게더, 야반가성, 금지옥엽, 아비정전, 영웅본색...
특별한 계획이 없으신 분들은 이제는 고인이 된 장국영과 함께, 데이트를 하시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