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신념이 악을 만든다.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The old for her
The new that made me think on Ireland dearly
‘Twas hard for mournful words to frame
to break the ties that bound us,
ah but harder still to bear the shame
of foreign chains around us.
And so I said: the mountain glen
I’ll seek at morning early
And join the brave united men
While shook the golden barley
-robert dwyer joyce-
아일랜드의 시인 Robert의 대표적인 서정시로 1798년 부활절 봉기에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한 젊은이의 운명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화인 ‘태극기 휘날리며’와 참 많이도 비슷한 영화
바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관한 글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젊은 배우 킬리언 머피가 동생역인 데미언으로 출연합니다.
튜더스라는 영국 드라마로 유명한 패드레익 딜레이니는 형인 테디 역을 맡고 있습니다.
헝거에서 마이클 패스밴더와 투톱을 보여줬던 리암 커닝엄도 출현합니다.
영화는 아일랜드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정부에 대항하여 1918년 설립된 IRA(아일랜드 공화국군)이 일으킨 게릴라전인 The Anglo-Irish War 와 영국과의 평화협정에 따른 조약지지파인 아일랜드 정규군과 그에 반대하는 조약 반대파인 IRA와의 전쟁인 Irish Civil War를 배경으로 아일랜드 젊은이들의 독립투쟁과정에서 형제의 비극적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출신 7천여 명의 영국군인 Black and Tans를 아일랜드에 투입합니다. 악명 높은 이 준군사조직은 권위주의에 넘치는 모습으로 아일랜드인 들에게 폭력과 테러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1920년 아일랜드 남서부 County Cork, 어느 날 허가 받지 않는 모임을 한다는 이유로 강제로 검문을 하며 한 소년이 영어로 자기 이름을 대지 않고 아일랜드 고유어인 게일어로 대답을 하자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소년은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그 사건에 데미언은 분노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 런던길에 오르는 데미언. 하지만 역사 내에서도 영국군들의 무자비함과 강제적인 모습을 목격하면서 참을 수 없는 자신을 목격한 데미안은 발길을 돌려서 형인 테디가 조직하던 게릴라에 몸담게 됩니다.
‘조국이라는 게 과연 이렇게까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거겠죠‘
역사 속 투쟁의 과정 속에서는 수많은 변절자들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어쩔 수 없이 조직을 배신하는 부류, 사사로운 이익으로 자신의 앞날을 가늠하는 부류. 어린 소년이 조직을 위험에 빠트린 사실로 인해서 처형을 하는 장면에서 오는 아픔은 누구의 아픔도 아닌 나 자신의 아픔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그 어린 소년의 마지막 유언이라고는 영국군과 같은 곳에만 묻어두지 말아달라는 말. 그저 조직 내에서 변절자로 남고 싶지 않음이 시대의 아픔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데미언과 테디가 조직한 IRA는 독립을 위해서 영국군과 게릴라전을 벌이고 끝없는 투쟁을 한 끝에 영국과 아일랜드는 평화조약을 채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평화조약은 북아일랜드가 진정한 독립이 아닌 영국령으로 남는 불평등조약이었습니다. 그동안 아일랜드 독립투쟁을 벌인 IRA는 조직 내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일단 조약을 받아들이고 점진적으로 개선하자는 측의 조약 지지파인 아일랜드 정규군,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하면 그 조약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투쟁을 하자는 조약 반대파인 아일랜드 공화국군. 조직에서 정치 쪽을 담당하던 형 테디는 조약 지지파로, 동생인 데미언은 조약 반대파로 갈라서고 이로써 IRA도 두 갈래도 나눠져 반목하게 됩니다. 영국군의 자리를 아일랜드 자유국 군인들이 대체하게 되고 결국 이렇게 동족끼리 총을 겨누게 됩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비극적이고 슬픈 영화입니다. 이 슬픈 정조의 핵심인 데미안은 모순된 사회에 대항하기 위해서 떠밀린 삶을 살게 되지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반문하며 운명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음에 고통스러워하는 회의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거듭되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도 사람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그는 폭력과 저항의 구별 속에서 모호한 자신과 맞닥뜨림으로 인해서 허구에 기인한 이념이 아닌 고뇌와 자유로 얼룩진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가 나타내려는 비극의 잔상이 그 무게를 더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켄 로치 감독은 진보적 신념을 일관되게 스크린에 구현한 영국의 대표적인 감독입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그의 국제주의자로서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무덤 비석에 사회주의자였음을 명기하라고 사전 유언을 남겨놓은 강골 좌파 감독답게 아일랜드의 독립투쟁을 다루면서도 아일랜드 지배계층이 아닌 가난한 이들, 약자의 관점을 세심하게 화면에 끌어들입니다. 민족과 계급 문제를 동시에 다루고 있지만 개별적인 인간들이 집단을 이뤄 그것들을 해결하는 데는 자가당착적인 모순이 필연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조리함에 반해 약자와 진보의 편에 서면서도 자기 내부 진영을 치열하게 검토하고 반성하는 이 태도로 집단이 지닐 수 있는 사유의 편린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윤리적 실존 문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일랜드는 현재 영국의 연방의 일원입니다.
이 영화는 지난 날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한 형제의 가족사를 그들의 역사 속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독립사 속에 있는 테드와 데미언으로 대변되는 형제의 이야기는 흡사 우리의 근 현대사와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독립사 속의 모습은 우리의 역사에 있어 광복에 이른 신탁통치, 남북 대립의 역사의 모습과 겹쳐있습니다. 그 시절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영화 속에는 순환론적인 역사의 구조가 깃들어 있습니다.
영국의 지배 시 이익을 취하던 자본가와 가난한 대중 사이에서 자신의 권익을 위해 자유를 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나 그들에게는 단지 일부 소수의 권력을 차지한 이들과 지난 날 자본가들만의 세상이 다가오게 됩니다. 정작 가난한 대중들은 세상의 변화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도 피부로 느낄 수 없는 껍데기임을 느낄 뿐입니다. 결국 그들은 다시 일어서지만,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건 다름 아닌 지난날 세상을 위해 함께 노력하던 옛 동료였습니다.
이러한 피의 되물림의 과정 속의 모습이 바로 예나 지금이나 되풀이 되는 하나의 구조적인 모순과 폐단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역사에 있어 수십 년 전이 아닌 현재를 돌아봐도 결국 동일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두들 민주화를 위해 애를 썼다고는 하나, 권력을 차지한 이후에는 서로간의 이념의 차이로 인해 반목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 영화의 형제들과 겹쳐 보입니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정의와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그 길을 가고 있는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어서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IRA를 다룬 영화는 꾀 많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헐리웃에서는 대부분의 영화가 IRA를 악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기존의 영화들이 보여줬던 시점을 바꾼 영화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IRA’ 내부에서의 투쟁과 민족상장의 아픔을 그리고 있기에 그 관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섀도우댄서’, ‘크라잉게임’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열연한 ‘더 복서’와 ‘아버지의 이름으로’, 브래드 피트의 ‘데블스 오운’, 밀고자, 리암 니슨의 ‘마이클 콜린스’, 블러디 선데이, 마이클 패스밴더의 ‘헝거’, ‘라이언의 딸’. 이 영화들 중 ‘더 복서’의 경우 복싱에 관한 영화이지만 IRA의 투쟁과 조직 내 갈등, 반목이 핵심 줄거리이기 때문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많이 비슷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와 가장 비슷한 우리 영화로 ‘태극기를 휘날리며’가 있습니다. 두 영화가 민족상잔과 형제를 그리고 있다는 점은 아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태극기를 휘날리며는 아주 극적이며, 감정적인 화면과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그에 비해 덜 극적이고, 냉철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시대에 초점을 맞추고 변화해가는 사건에 초점을 맞춰서 극의 흐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느껴지는 감정은 감동과 감탄 보다는 씁쓸함과 아픔입니다. 가슴을 진하게 울릴 역사적 사실들 속에서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차별과 신념이 악을 만든다.’
이 영화에서 선악의 기준은 갈등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영국군의 차별적이고 가혹한 행위가 그들로 하여금 조직을 결성하고 독립을 위해 애쓰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떠났음에도 결국 자유라는 감정보다는 안위의 행위들로 인해서 서로가 갖고 있는 신념의 갈등으로 인해서 다시금 파탄을 맡게 됩니다. 집단의 행위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누구를 위해서 자유를 갈망하는지, 그저 그렇게 그들과 손잡을 수 없는지...
그 방향성을 잃어버린 것은 결국 권력이 야기한 것입니다.
확고한 목표가 아닌 방향의 차이.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감독의 투쟁적인 메시지가 강렬합니다.
마치 영화 속에서의 인물들이 죽음을 앞두고 늘 유서를 써놓듯이
진실을 토해내는 일련의 과정들은 삶에 대한 발악처럼 핏대를 세우고 있습니다.
"아직 안 늦었어, 데미언"
"내가, 아님 형이?"
회유와 변절...
역사는 늘 현실의 한계와 미래의 가능성을 가늠하면서 변명과 당위성을 역설합니다.
그들의 역사이면서 우리의 역사인 것을 영화 곳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덧붙인다면 이 영화가 뛰어나게 포착한 또 다른 것은 너무 고유하고 개별적이어서 집단에 귀속시킬 수 없는 인간의 눈동자들입니다. 데미언은 자신이 제어할 수 있다고 믿고 뛰어들었다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결국 무력감에 회한에 차서 눈물짓는 눈동자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산천의 의구함과 인간 눈동자의 개별적인 아름다움
이 영화를 떠올리면 남는 이미지들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데미언이 작성한 글로 글을 마무리 할까 합니다.
'무엇에 반대하는지 아는 건 쉽지만, 뭘 원하는지 아는 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