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사랑니가 있다. 네 개나 있다. 네 개 중에 세 개는 훌쩍 자라 어금니 흉내를 내고 있고 막내 하나는 아직 반쯤 잇몸에 덮혀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뽑아도 볼까 생각했지만, 비뚤어지지 않고 온전히 난 걸 뽑는게 영 내키지가 않아 이제껏 내버려두고 있다. 가끔 술을 흠뻑 마시면 잇몸이 뻐근하게 아픈 날이 온다. 그런 뻐근한 고통이 서너일 간다. 그러고 나면 훌쩍 사랑니가 자라있다. 그런 고통을 견디면서 세 개의 사랑니를 키웠고, 이제 딱 하나 남았다.
사랑니가 자랄 때마다 잇몸이 아프다. 아마 1밀리미터도 되지 않는 성장이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잇몸을 찢어야하기 때문이리라. 네 번째 사랑니는 어찌된 영문인지 다른 사랑니보다 성장이 더디다. 보통 열번 안 쪽으로 아프다가 온전한 사랑니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막내는 열 번을 훌쩍 넘게 자라면서도 아직 자기 모습을 반 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얼마나 자라려는지는 몰라도 잇몸이 퉁퉁 부어 뭘 씹을 때마다 음식보다 먼저 몸을 내밀여 생채기가 났는데 도무지 낫지를 않는다. 마른 오징어를 씹고 있는 지금도 오징어를 입에 넣고 씹으면 오징어보다 먼저 퉁퉁 부은 네 번째 사랑니의 잇몸이 먼저 씹힌다.
아프다. 아플 때마다 고민한다. 뺄까? 잠깐은 훨씬 더 극심한 고통을 느낄테지만 앞으로는 영원히 사랑니 때문에 아프지 않을테니까. 어쩌면 빼는게 나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반 쯤 모습을 드러낸, 어쩌면 올해 안에 온전히 자기 역할을 할 사랑니를 떠올리며 생각을 고쳐 먹는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이게 마지막이니까. 첫 사랑니가 날 때는 이런 인내를 갖고 있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십년도 훨씬 전에, 아프지 않게 자라났던 녀석이니까. 그리고 그 때는, 아프다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으니까. 조금씩 오래 아프고 말지 한 번에 너무 아픈 것이 무서웠을 때였으니까. 그런데 어느 덧, 고통의 연속성이 고통의 절대값보다 더 고통스러운 나이가 되었다. 약하게 오래 괴롭힘 당하는 것보다는, 한 번 크게 상처받고 훌훌 털어버리는게 낫다는 마음을 먹게되는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뽑고싶지 않다. 오징어를 씹을 때마다 따끔하고, 이를 닦을 때마다 귀찮음을 감내해야하지만 적어도 나만큼은 내 몸안에서 돋아난 이 사랑니를 쓸모없다고 단정하고 싶지 않다. 내 입 안에서 오래오래 자신이 타고난 운명을 짊어지게 하고 싶다. 그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 시간동안 나는 고통받는다 하더라도.
내겐 사랑니가 있다. 네 개나 있다. 미처 자라지 못한 네 번째 사랑니가 다 자라나는 때가 오면 나는 언제 아팠냐는듯이 마른 오징어를 우적우적 씹어댈거다. 그 때쯤이면 잇몸에 상처도 안 날 거고 사랑니가 없는 다른 사람들보다 30초는 더 양치질을 해야할 거다. 그럼에도 이 네 개의 사랑니를 지켜내기 위해서 내가 감내했던 고통들이 어쩌면 스스로에게 굉장히 뿌듯한 경험으로 남게 될 것 같다. 보잘 것 없는 이 친구들이 제 역할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는 울면서 오징어를 씹었고 양치를 할 때마다 붉은 피를 뱉었다.
고통은, 고통을 당하는 대상이 살아있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내가 고통을 몰랐다면 36년을 살아오면서 열 개의 손톱이 온전히 남아있진 못했을거다. 자그마한 상처에도 아파하고 그 아픔이 싫어서 조심하다 보니 나는 지금의 내 한 몸을 건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난 후로는 고통이 더이상 두렵지 않다. 고통은 나를 지켜주는 힘이다. 고통이 지나가면 그 곳에는 온전한 내 육신이나 혹은 작은 성장이 있다. 사랑니 같은. 앞으로도 종종 고통을 마주하는 시간이 올거다. 아플거다. 그러나 그 아픈 시간은 반드시 나에게 보은할거다. 그래서 고통이 무섭지만 싫지는 않다. 그래, 어디 한번 쎄게 부딪혀봐라. 무척 아프더라도, 나는 웃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