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에서 신입 PD를 채용합니다."
당시 PD 지망생들은 대부분 MBC를 1 지망으로 생각했다. 나 역시 그랬고. 무한도전, 무릎팍 도사, 라디오 스타 등등 무언가 색다르고 창의적인 프로그램들이 MBC에 많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송국에 합격하면 안 가느냐? 그건 절대 아니다. 이 작은 한반도에 방송국은 손에 꼽을 정도고, PD가 되고 싶은 젊음은 그 자리에 비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붙여만 주신다면 제 육신 불태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게 기본적인 PD 지망생들의 자세였다. 그리고 처음 만난 게 SBS의 채용 공고였다. 꿈을 위해 삼성을 포기한 내가 가장 먼저 선택한 방송국. "그래, SBS. 내가 시험을 봐주마!"
방송국 입사 전형은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긴 할 테지만 보통 서류-필기-면접 1-면접 2-(합숙면접)-최종발표의 순서였다. 서류는 대부분 합격하기 때문에 일단 가장 큰 첫 관문은 필기시험이라고 볼 수 있다. 필기시험은 크게 상식과 작문으로 나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상식에서 평균정도, 혹은 평균에 살짝 못 미치더라도 작문으로 충분히 승부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응. 아니야."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사람이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상식이 부족한 인간이었다. 거의 한 50여 문항이 출제됐는데 제대로 적은 거라곤 '빅뱅 멤버의 이름을 모두 쓰시오' 한 문제였다. 지금은 적을 수 없는 이름이 몇 개 있긴 하지만 그땐 정말 자신 있게 모두의 이름을 다 적었다. 심지어 G-DRAGON(권지용) 이렇게 본명까지 같이 적었다. 내가 비록 하나밖에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그 하나는 정말 깊게 알고 있다는 걸 어필하고 싶었나 보다. 첫 번째 PD 시험은 그렇게 상식의 문 앞에서 차갑게 좌절됐다. '아, 혼자 공부하면 안 되겠구나.'를 절절히 느꼈다. 누군가와 이 지난한 상식 공부의 길을 함께 가야 했다.
"스터디원을 모집합니다."
PD지망생들이 시험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바로 다음카페 '아랑'에 가입하는 일이다. 수험 정보를 공유하고, 넋두리도 하고, 합격 수기도 올라오고, 현직 PD, 기자들의 자조 섞인 술주정도 올라오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PD 시험을 준비할 동지들을 모으는 곳이다. 스터디원 모집 공고를 뒤져 지역과 구성이 내 마음에 드는 몇 곳을 추렸다. 특히 인기가 많은 건 '합격자 다수 배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스터디 공고들이었다. 그런 스터디는 지원하는 사람들의 작문을 받은 뒤 자기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자기들과 공부할 기회를 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합격을 한 스터디원들은 이제 그 스터디에 남아있지 않고, 엄밀히 말하면 합격에 실패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지원자 심사를 하다니. 그때도 왠지 이런 사실이 배알 꼴리기도 해서 신생 스터디 모임에만 지원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화여대 ECC에서 대망의 스터디 출정식이 열렸다.
남자 셋 여자 셋. 스터디장이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비가 딱 1:1이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모여 서로가 이 시대의 상식이라고 생각되는 질문들을 열몇 개씩 뽑아와 서로 공유하고, 랜덤으로 주제를 골라 라이브로 작문을 한 뒤 서로 첨삭을 해주고. 그러다 친해지고. 등산을 가고.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스터디는 생각보다 빨리 일상처럼 익숙해졌다. 그리고 나와 5명의 동지들에게 MBC 모집 공고가 나타났다. 나의 1 지망 방송국이자 우리의 1 지망 방송국. 가슴이 뛴다. 지난번 SBS 땐 내가 상식이 조금 부족했지만, 이 든든한 나의 동지들과 함께 나는 상식력도 +1이 되었고 작문력은 거의 +100이 되었다. 기다려라 MBC, 기다려라 김태호 PD.
"서류 전형에서 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MBC는 내게 필기시험을 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서류 합격 발표가 나고 스터디원과 연락해 보니 붙은 사람과 떨어진 사람이 반반이었다. 도대체 그 기준을 알 수는 없었다. 알바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막걸리 한 병과 고추참치 한 캔을 사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달큼한 막걸리 한 모금에 고추 참치 한 젓가락일 입어 넣어 씹으며 단, 짠, 맵, 신의 4 미에 인생의 쓴 맛까지 5 미를 느끼며 취해갔다.
"형, 나 붙었어."
남자 셋 여자 셋 스터디에서 드디어 합격자가 나왔다. 나보다 한 살 어린 T. 하지만 T가 붙은 곳은 SBS도 KBS도, MBC도 아니었다. CJ의 어느 계열사에서 운영하는 지역 뉴스 방송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그저 'PD'라고 불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던 때였다. 그렇게 T는 스터디를 떠나고 우리도 조금씩 동력을 잃어갔다.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전격적인 기자회견도 없이 해체 수순을 밟았다. 누군가는 대학원으로, 누군가는 신춘문예를 준비하러 떠났다. 그리고 나는 뜻하지 않게 극단에서 일하던 고등학교 친구의 부탁으로 대학로 연극 무대로 떠났다.
* 방송국놈 12년은 인스타툰 https://www.instagram.com/jemtoon/ 에서 웹툰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