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잠깐 우리 극단 일 좀 도와주라."
스터디도 시들해지고, 올해 방송국 채용 공고도 끝난 시점이었다. 지리한 일상을 이어가기보다는 뭔가 안 하던 걸 하고 싶던 차에 만난 친구의 제안이었다. 당시 한창 라이징하던 배우인 '오달수' 형님이 주연을 맡은 '마리화나'라는 연극의 조명 오퍼레이터였다. 제대로 연극을 본 적도 없고, 연극 조명은 더더욱 본 적 조차 없던 나이기에 좀 망설였지만 친구는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야, 국민학교만 나오면 다 할 수 있어."
오후 2시에 공연장으로 출근해서 공연장 청소를 하고 있으면 배우 선배들이 하나둘씩 오신다. 각자 몸을 풀고 대사 연습을 하고 있으면 나는 생소한 조명 기계 앞에 앉아 어느 장면에서는 몇 번 몇 번 조명을 얼만큼 켜고, 다음 장면에선 뭘 끄고 켜고 하는 일종의 설명서를 보며 열심히 연습을 한다. 그리고 공연이 시작되면 연습한 대로 열심히 조명 기계를 만진다. 당연히 여러 실수를 저지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명이다 보니 한두 개를 더 켜거나 더 끄거나 해도 관객이 알아차릴 일은 많지 않았다. 가장 긴장할 때는 모든 조명을 적절한 타이밍이 꺼야 하는 '암전'과 그 암전 후에 정확한 타이밍에 조명을 켜야 할 때뿐이었다. 한 번은 공연이 시작한 후에도 한동안 객석의 조명을 끄지 않은 적이 있었다. 암전을 시키려고 모든 조명 스위치를 내리려고 보는데 객석 조명이 아직도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랬던지.
"못 하는 건 연습하면 돼. 근데 넌 게을러."
초짜 조명 오퍼레이터여서였을까. 배우 선배들은 조명의 사소한 실수 하나하나를 혼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 좀 엄한 선배 하나는 공연이 끝난 후 회식을 하면서 나를 크게 혼냈다. 조명을 못해서가 아니라 게을러서. 왜 조금 더 일찍 와서 연습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PD 시험을 보고, 스터디를 하고 또 PD 시험에 떨어지고. 그게 내가 6월에 전역을 하고 6개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연극 무대에서 조명 오퍼레이터 일을 한 건 그 해 12월. 나는 슬슬 PD라는 꿈이 좌절됐을 때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연 준비 전에 종로의 토익 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오전에는 토익 공부, 오후에는 조명 연습, 저녁에는 공연, 공연 후에는 회식. 이 헐겁지만 빈틈없는 일상을 열심히 영위하고 있음에도 나는 '게으르다'라는 이유로 혼이 났다. 아마도 공연이 꽤 진행됐는데도 늘지 않는 내 조명 실력이 게으름 때문이라고 선배는 생각했나 보다.
"나 담배 끊으려고. 와이프가 인형 눈 붙이는 알바를 하는데,
눈 100개 붙여야 담배 한 갑 값이더라고."
하마터면 일반 기업에 들어가 회사원이 될 뻔했던, 그러나 'PD'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그걸 걷어차고 자발적 백수 상태로 대학로 조명 일을 하고 있는 나. 그리고 '연기'라는 꿈을 꾸고 그 꿈을 현실로 이룬 눈앞의 배우 선배들. 하지만 선배들의 모습이 마냥 낭만적으로 부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대개 '생계'라는 적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내가 그때 조명 오퍼레이터로 한 달을 일을 하고 30만 원 남짓의 월급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공연은 매번 만석이었지만 공연장 대관료에 무대 세트비에 이런저런 고정 비용을 빼고 나면 스태프들과 배우 각자에게 돌아가는 돈이 그리 풍족하지는 않았으리라. 그중 게으르다는 이유로 나를 혼냈던 선배는 와이프가 인형 눈을 붙이는 부업을 하고 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게 다 자기 담배값으로 나가는 것 같다며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에쎄 순을 깊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선배들을 보며 '꿈'과 '꿈을 이룬다.'를 더 깊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깨달았다. '꿈을 이룬다.' 앞에는 반드시 (생계유지가 가능한 만큼 벌면서)라는 전제가 붙어야 한다는 것을.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래서 더더욱 가열하게 PD가 되지 못했을 때의 플랜 B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별건 아니었다. 그저 대기업에 넣을 서류를 준비하게 시작한 것뿐이었다. 1년에 꼴랑 MBC, SBS, KBS 세 회사에 원서를 넣고 합격을 기다리는 건 꿈을 위한 길이면서도 생계를 포기하는 일이라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고생했다. 이거 소고 긴데 집에 가서 국 끓여 먹어. 설 보너스야."
극단의 대표이자 우리 연극의 연출자였던 연출님이 검은 봉다리 하나를 내미셨다. 어느덧 나는 대학로에서 새해까지 맞았다. 월요일 빼고 매일 출근, 회식 후 밤 12시 이후 퇴근. 급여는 월 30만 원. 극악의 워라밸인 직장이었지만 지금까지 받아본 그 어떤 설 보너스보다 인간적이고 따뜻한 보너스였다. 물론 그걸 엄마에게 갖다 줬을 때 엄마의 리액션은 그닥 따뜻하지 않았지만. 공연은 이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나 역시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를 정할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스물일곱.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더 도전할 수 있는 젊은 나이였지만 그때의 나는 점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분명 나는 1년 안에 승부를 보려고 했는데, 그 1년이 벌써 반 이상 지나 있었다. 이렇게 PD지망생 시절이 점점 길어지다 보면 대기업에도 취직하지 못하는 나이가 되지 않을까 두렵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스물일곱은 따뜻한 소고기 한 근과 차가운 조바심과 함께 시작했다.
*방송국놈 12년은 인스타 툰 https://www.instagram.com/jemtoon/ 에서 만화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