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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제라블 Sep 16. 2023

을지로의 직장인

스타트업 다니는 삶의 모양

* 7월 1일쯤에 쓴 글을 지금에서야 브런치로 옮겨본다.


내가 을지로의 직장인이 된 것은 넉 달 전의 일. 삼성SDS라는 안락하고도 평화로운 직장을 그만둔 것은 그보다 한 달 전의 일이다. 



잠실역 근거리에 있는 삼성SDS 건물. 출근하기 좋았다.

잠실 올림픽로35길 125에 위치한 거대한 빌딩에 카드를 찍고 들어간 것이 그로부터 2년하고도 10개월 전이다. 그 모든 시간이 흐른 뒤 퇴직을 했다. 별안간, 갑자기, 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별다른 계기도 없이 누가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하지만 나는 원래 중요한 선택을 감성적으로 하는 편이다. 정말로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면 모두에게 설명하기가 더 편했으리라 생각한다. 개연성 없는 소설의 한 부분처럼 나의 퇴직은 좀처럼 아귀가 들어맞는 설명이 없었다. 



어떤 불만족이 있었나? 퇴직 시 입력하는 설문 조사에 그런 항목이 있었다. 당사가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면 작성해주십시오. 불만이 있어서 떠나는 것은 아니므로, 딱히 생각나는 건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그게 정말이니까. 회사는 장점이 많았다. 그 많은 장점들 때문에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회사의 처우는 관대했다. 유연한 근무시간, 여유가 보장되는 삶, 서울 도심 근무, 훌륭한 복지 (아직도 그리운 사내 마사지 서비스와 20가지가 넘는 점심메뉴), 실력과 인성이 검증된 동료들. 무엇하나 불만족할 부분이 없었다.


새롭게 또 무언가를 배워가던 10개월차 직장인

그런데도 퇴직을 했다. 처음 회사를 선택했을 때, 내가 바라던 몇 가지가 있었다. 평온하고 조용하며, 규칙적인 삶. 성취에 매달리지 않지만 충분히 성실한 삶. 불순물 없는 내면의 평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세상에 다양한 모양의 삶이 있음을 아는 것. 2년 10개월을 꼬박 써서 그것들을 성취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만 아는 것이지만.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졌다. 누구나 마음에 불안감이 있을 것이다. 나도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불안을 충분히 손에 쥐고 쉬이 다룰 수 있음을 안다.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는 것도. 삶이 어떻게 흘러가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아무렇게나 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원하는 바가 없다는 뜻도 아니다. 멈추겠다는 말도 아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할지 또렷하게 안다는 것이고, 어떤 선택에도 책임질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을지로3가 명보사거리 한 켠에 위치한 알고케어로 왔다. 위대한 각오 같은 건 없었다. 조금 더 손에 잡히는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다. 


을지로는 역시 국밥과 삼겹살이다. 진정한 직장인이 된 기분.
힙지로에서 마시는 커피. 그리고 회사에서 마시는 돔페리뇽.


을지로에서의 삶의 모양은 그 전과 조금쯤 다르다. 단순히 출근시간이 1.5배 정도 늘어났다거나 퇴근시간이 엄청 늦어졌다거나 새벽 세 시까지 일하게 되었다거나 점심으로 국밥을 먹게 되었다거나 힙지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거나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다거나 그런 것뿐만은 아니다. 에너지와 방향에 대한 것이다. 이 조직은 힘이 있다. 웃음이 있고 눈물이 있다. 분노도 있고 행복도 있다. 서로 다른 별난 사람들의 집합으로부터 오는 힘이 있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도전. 새롭게 겪는 일도 있고 해봤던 일들도 있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


사실은 힘에 부치기도 한다. 매일매일이, 모든 일이 어려움이므로. 옴짝달싹 하기가 어렵고 숨이 턱턱 막혀온다. 해야할 일을 하나씩 하는 건 어림도 없고, 반드시 순차로 해야하는 일이 병렬적으로 벌어져야 한다. 그 무엇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운동화 끈을 동여매기도 전에 달려야 하고, 아니 사실은 일어서기도 전에 달릴 것을 요구받는다. 그리하여 이곳에서의 삶은 경사로의 눈덩이 아래서 뒷걸음질치며 그 덩어리를 굴려가는 삶이기도 하다.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그 눈덩이에 깔려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도 재미있게 지낸다. 웃음과 즐거움.
때로는 고민도 깊어지지만. 그래도 하나씩 부수면서 앞으로 전진.


그래도 그 선택 속에서 반짝거림을 본다. 희망을 본다. 반짝이는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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