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로서의 결혼식
핸더스에 다녀온 이후. 우리는 몇 가지 의사결정의 관문-우리의 합의, 양가와의 협의-을 모두 통과하고 이 이상한 형식의 결혼식에 대한 결재를 득했습니다.
예식은 직계가족끼리만 하고, 그 이후의 와인파티를 지인들과 함께하는 결혼식
듣도보도 못한 이 결혼식(이라고 쓰고 와인파티라고 읽는)은 그렇게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할 일이 많이 있고, 기한이 정해져 있으니, 일종의 프로젝트가 맞죠. 그렇다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로 계획이 필요합니다. 한정된 리소스(돈, 시간, 노동력)를 최적으로 사용해서 최대의 결과를 내려면요. 그것이 바로 엣티제의 길...
그래서 착수했습니다. 프로젝트로서의 결혼식, Project_A Little Bit Married라는 이름으로.
아니 무슨 결혼식에 목표를 다 정하냐 원칙을 잃지 않고 일관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목표입니다. 목표 없이 일을 벌이면 보통 프로젝트는 산으로 가니까요. 큰 목표를 잡아야 세부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가 정해지니, 이게 제일 중요한 단계겠죠. 원래라면 목표와 원칙이 분리되어야겠지만 이건 뭐 개인의 인생 프로젝트니까 살짝 대충(이미 대충이 아니야...) 넘어가도록 하는 걸로.
애초에 우리의 시작은 10명 정도 모여서 진행하는 직계가족 결혼식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과도한 인원을 초대한다든지 그런 것들은 준비 계획에서 엄청난 변경과 스트레스를 가져오겠죠? 실제로 저희는 마당식을 하면서 손님이 '마당'에만 있기를 바랐고 공간도 좀 더 여유롭게 사용하기 원했기 때문에 인원을 더 늘리는 게 선택지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저희는 직계가족 12명 + 그만큼의 손님 초대 정도까지를 범위로 잡고 가기로 했습니다.
이 이벤트가 저녁에 마당에서 와인, 이걸로 시작된 것이다 보니 그 목표가 중요했죠. 마당이 중요했기 때문에 실내에는 테이블을 배치하지 않기로 했고, 그래서 테이블과 좌석 배치가 중요해졌습니다. 또 그리고 맛있는 술이라는 목표라는 것은 곧 좋은 술이면서 이벤트에 어울리는 술을 고르고, 구매까지 해야 한다는 과정을 내포하게 됩니다. 이것은 향후에 엄청난 후폭풍을...
원래 스몰웨딩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규모만 스몰이지 비용은 그에 비하면 전혀 스몰하지 않죠. 친언니가 이탈리아에서 초스몰 웨딩을 준비하고 결혼식을 올렸을 때(형부가 이탈리아인...) 이미 전 알게 되었습니다. 초스몰 웨딩은 그만큼 초호화 웨딩이라는 것을요.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요. 하여튼 결혼식 규모와 비용은 정확히 반비례합니다. 이것은 경험적인 깨달음. 재주껏 절약을 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저는 아니었던 걸로... 여하튼 우리의 목표는 스몰웨딩이지만 꽤나 근사한 그런 이벤트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과도하게 사치할 필요는 없지만, 비용에 너무 얽매이지 말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차라리 열심히 더 벌자 고통받는 미래의 나.... 미안해...
가장 중요한 것 목표 중 하나였죠. 어쩌면 이게 전부였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유엑스 했던 사람인데요. 사용자 경험만 무려 10년 가까이 해왔는데 내 결혼 경험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죠. 우리의 결혼 경험은 어떨 것인가?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과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고 밥먹고 술먹고 떠드는 그런 그림을 생각했습니다. 아마 초대받는 사람들은 평생 꽤 많은 결혼식에 가게 될 텐데 그중에서 가장 특별한 기억,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기억에 남는, 다시없을 결혼 경험은 무엇인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그에 맞춰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목표를 설정했으니 몇 가지 중대한 마일스톤들—사진촬영, 결혼식 등—을 중심으로 할 일을 리스트업하고 예산, 할일, 기한, 책임자 할당하여 수행해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엄격한 관리자 엣티제 주의...
하여튼 어떤 일이 있고, 무엇을 결정하고 이런 히스토리들을 보관할 필요가 있었는데 다양한 툴들이 있지만, 일종의 협업 프로젝트이니 노션(Notion)을 활용해서 이 일을 처리해보기로 했습니다. 결혼 준비하시는 많은 분들이 구글 시트, 엑셀, 카페, 블로그를 활용하며 나름대로의 방식을 활용하고 계시는데, 노션도 그중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니 한 번 고려해보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장단점이 있었지만 저희의 경우 이 정도의 심플한 개인 프로젝트에는 꽤 괜찮았거든요. 노션을 활용하면서 제일 좋았던 점 중에 하나가, 여기에 기록을 하면서 별다른 편집이나 불편함 없이 이걸 페이지로 남에게 공유할 수 있었던 점입니다. 오롯이 이 주제로 우리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요. 뭐 조금 남달라 보일 수 있다는 점은 덤...
제일 유용하게 썼던 건 위 이미지에서 보셨듯이 Roadmap이라는 부분인데요. 뭐 뻔하죠. Task 카테고리 나누고 할 일 만들고 할당해서 누가 무슨 일을 할지 정해놓고, 완료되면 그 내용 넣어놓고 그런 거였죠. 구체적으로 어떻게 썼는지 간략히 공유해볼까요. (누가 궁금해하긴 하려나...)
저는 어쨌든 무슨 일을 하든 원칙이 필요하다는 주의입니다. 빨리 하는 게 중요한지, 신중한 게 우선인지, 세세한 것까지 다 상의할 것인지, 적당히 알아서 할 것인지 명문화를 해두면 편하겠죠. 물론 이렇게 써놓고 어겼다고(?) 서로를 책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같이 발을 잘 맞춰나가기 위해 만든 규칙이니까요. 이건 당시에 써놓은 내용입니다.
가장 중요한 아파트 계약 및 입주 날짜, 부모님과의 협의를 통해 6월 중순까지 대부분의 일들을 마무리 짓기로 결정했습니다. 세세한 것까지 규율하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중심으로 세부적인 일들을 조율해나가기로 합니다.
1. 실용적인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과도하게 실용을 따지며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합니다.
2. 누가 어떤 종류의 일을 할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남들이 어찌하는지 혹은 어찌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만의 길을 잘 만들어가는 것에 집중합니다.
원래 결혼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비싼 이벤트거든요. 효용보다 사실 좀 가격이 비싼 편인데, 한 번 한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죠. 그래서 최대한 경제적으로, 실용적인 부분을 강조해서 형식적인 부분은 좀 건너뛰자는 것인데요. 하지만 그렇다고 실용을 너무 따지다 보면 원하지 않는데도 가격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밸런스를 잘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또 하나 생각한 부분은, 남들과의 비교인데, 이게 많은 사람들이 이미 했거나, 하고 있거나, 할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항상 사례를 찾아보게 돼요. 하지만 연구할 때도 그렇고 뭘 할 때도 그렇고 종종 레퍼런스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거기에 잡아먹히게 됩니다. 다른 게 항상 더 좋아 보이고, 따라하고 싶어지고 뭐 그렇습니다. 그것이 인간... 하지만 정말 그게 내가 원하는 건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겠죠. 원하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남이 하는 거 하고 싶으면 하면 됩니다. 근데 진짜 하고 싶냐는 거죠. 자기 마음은 자기만 아는 거니까... 그걸 잘 들여다보는 게 중요합니다.
인프피인 배우자에게는 살짝 버거웠던 프로젝트의 촘촘한 계획과 수행. 지금 와서 다시금 고맙다는 인사를... 로드맵 페이지를 만들고, 12개의 중간 레벨 이상의 카테고리(많다...)를 만들고, 각 카테고리 아래에 세부 할 일들을 할당하고 그것들의 진행상황을 다시 대시보드로 만들어서 관리하는 뭐 그런 체계를 세워서 일을 진행했습니다. 지금 보니 조금... 숨막히는 것 같기도?
첫 번째로 한 일은 거시적으로 일의 덩어리를 나누고 세부적인 태스크를 리스팅하는 것입니다. 모든 해야 하는 일들을 정리하고, 그것들을 카테고리로 나누어 분류하고 리스팅했죠. 총 12개의 카테고리 밑에 58개 정도의 태스크가 있었습니다. 카테고리 예시는 이런 거예요.
제안 및 기획
행사준비: 장소
행사준비: 진행
행사준비: 음식
행사준비: 복장
청첩장 제막 및 배포
입주 준비
반지 준비
신혼여행
스냅사진
웹페이지 제작
기타
하나둘씩 처리를 해봤지만 어쩐지 진행이 더딘 것 같고, 전체적인 프로그레스가 잘 보이지 않아 대시보드도 한 번 만들어봤습니다. 저 프로그레스 바 만드는 건 은근히 까다로운데 (어렵지는 않은데 뭔가 귄찮습니다) 생각보다 만들고 나니 수치에 따라 모양도 제각각이고... 생각보다 잘 채워지지 않아서 동기부여에 크게 도움은 안됐지만 그럴듯하긴 하죠?
리스트업을 한눈에 봐야 할 때는 가장 처음의 리스트형 할일 목록을 참조하고, 당장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할 때는 이 보드뷰를 활용했습니다.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여러 가지 뷰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건 Notion의 주요한 장점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사실 그 외에는 엄청나게 편리함을 느끼지는 못했...
어쨌든 결혼식까지 할 일의 거의 대부분을 완료했고, 노션이 큰 일 해주었습니다. 그때그때 기록해뒀던 이벤트 로그를 바탕으로 실제로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시간 순서대로 잘 알 수가 있어 지금도 이렇게 잘 사용하고 있고요. 그 덕에 브런치 작가도 되고 개꿀 아니냐..
예산도 기록을 하나씩 해두니까 얼마나 쓰는지 알 수 있고 좋더라고요. 처음에는 "아니 돈을 이렇게 많이 써도 되는 건가?" 싶다가 나중에는 조금 무감각해지는 부분도 있고요. 예산과 실제 지출액 다음에 원래 '절약률'을 넣어뒀는데 나중에 뺐습니다. 대부분 초과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후문... 알아보니 뭐 저희 정도면 적당한 수준(?)인 것 같기도 하고요. 하여튼 결혼이라는 건 그 알맹이에 비해 확실히 비싼 이벤트이긴 한 것 같습니다.
예산을 비롯해서, 무엇을 샀는지 쇼핑 리스트, 위시리스트도 만들고 이것저것 같이 잘 활용했습니다. 무엇이 됐든 이런저런 기록들을 그때에 생생하게 남겨두는 게 여러모로 좋은 것 같아요. 지금 이걸 정리하고 쓰는 시점이 벌써 1년 하고도 2개월이 훌쩍 지난 8월이니 말이죠.
노션이 기록해뒀던 이야기와 아직 쓰지 않았던 몇 가지 토픽들에 대해 슬슬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지금 생각나는 걸로는 이런 이야기들이 있는데, 쓰다 보면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툭툭 튀어나올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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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가 손에 뭔가가 잘 안 잡히고 무슨 소리야, 하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좌충우돌이 이어지게 될 테니 재미있게 봐주시길 바라겠고요. 누군가에게 조금쯤 도움된다면 더욱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