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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일영 May 13. 2020

헌책방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헌책방에서 쓰는 편지

뜬금없이 웬 헌책방?


요사이 저는 '살랑서원'이라고 이름 붙인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세련된 서점도, 관광지의 힙한 책방도 아닌 그냥 헌책방이라니 좀 뜬금없죠. 자세한 이야기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하는 것으로 하고요. 어쨌든 저는 요즘 헌책방 아저씨가 되어 오래된 책을 팔고 있습니다. 헌책방 아저씨. 촌스럽고 구식인 저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나름 재미도 있고요.


책방은 촌스럽지만 찾아주시는 분들은 그렇지 않답니다.


기억하나요?


오래전 그러니까 한 십 년 전이나 이십 년 전에 읽었던 책을 기억하나요? 십 년 전쯤 저는 고골의 외투와 체홉의 단편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덕분에 이후로도 단편소설을 많이 읽게 된 것 같아요. 그전에는 단편을 볼 일이 많지 않았거든요. 더 오래전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환타지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요. 탐그루, 세월의 돌, 드래곤 라자, 카르세아린,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가즈 나이트, 사이케델리아 등이 기억나네요. 야자시간은 물론 수업시간에도 몰래몰래 열심히 봤답니다. 덕분에 지금도 환상소설을 한 편 정도 꼭 쓰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고요.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갈매기의 꿈, 소공녀, 야성의 부름 같은 흔한 어린이를 위한 명작선을 많이 봤어요. 특히 쥘 베른과 찰스 디킨즈의 작품을 많이 좋아했답니다. 쥘 베른의 모험과 디킨즈의 어두운 유머를 꽤나 좋아했던 기억이 있네요. 당신은 어떤가요. 인상 깊었던 책, 주인공과 등장인물, 그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를 따라 함께 모험하던 당신. 기억하나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책만 봤더니,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책이 나를 만들었다고?


제가 한결같이 허황된 꿈을 품고 사는 게 어릴 때 쥘 베른을 열심히 봐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원래 허황된 사람이라 쥘 베른을 좋아했던 걸까요. 어쩌면 지금 이렇게 힘들게 사는 이유가 디킨즈를 좋아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런 생각, 누구나 한 번쯤 해봤겠죠. 재밌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며 삽니다. 어린 시절의 선명한 경험, 또렷한 기억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여기지요. 트라우마 역시 마찬가지고요. 지금의 제가 되기까지 많은 요소가 영향을 끼쳤을 테죠. 유전, 교육, 문화, 친구, 경험, 사랑, 이별 등 아주 많은 요소가 모이고 쌓여서 지금의 저를 만들었겠지요. 그중 하나의 요소가 책이라면, 그래서 책이 저를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큰 허풍일까요. 허풍이면 또 뭐 어떤가요. 저는 쥘 베른을 읽고 주성치 영화와 머털도사 만화를 보며 자란 덕분에 이렇게 되어버린걸요.


주성치 영화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 또한 없었겠죠.


너의 재질은 무엇?


저를 만든 것들 중 일부가 책이라면 당신을 만든 것들은 무엇일까요. 당신이 지금의 당신이 되는 동안 켜켜이 쌓여온 당신 인생의 지층엔 어떤 경험이 숨어 있을까요. 분명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요. 요즘엔 책이 아니라 유튜브가 사람을 만드니 유튜브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린 시절의 만화영화도 있을 테고요. 어느 시절의 사랑과 이별 혹은 여행이 있을 수도 있겠죠. 저와 비슷한 또래라면 싸이월드나 다모임, 버디버디도 있을 테고요. 그중 책 한 권 정도는 있지 않을까요. 분명 있을 거예요. 동화책이든 만화책이든 소설책이든 아니면 학창 시절의 참고서든 말이에요. 저는 가끔 십오소년 표류기가 생각나곤 합니다. 그 책을 생각하면 다른 많은 것들이 같이 떠오르곤 해요. 친구들과 학교 뒷산에 올라가거나 바닷가에 놀러 가면서 느꼈던 설렘과 숲의 냄새, 바닷속 해초를 밟았을 때의 느낌이 책과 함께 떠오르곤 합니다. 제가 십오소년 표류기를 읽던 즈음의 일이거든요. 꽤나 오래전, 제가 사 학년 때의 일이랍니다. 아마 저의 재질은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것 같아요. 숲의 냄새나 해초의 느낌 같은 것들이요.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의 재질은 어떤 것들로 이루어졌나요?


최근의 저는 아마도 살라의 포근한 털과 푸른 하늘, 파란 바다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아요.


궁금하지 않았던 궁금증


당신에게도 그런 책이 있겠죠. 책에 담긴 이야기뿐 아닌 당신의 이야기가 함께 묻어있는 책이요. 어떤 책일까요. 궁금하네요. 헌책방은 제게 그런 궁금증을 키워주고 또 그 답을 언뜻언뜻 주는 곳입니다. 잊고 있었던 먼지 쌓인 기억을 발견하기도 하고, 다른 이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오래 묵은 감정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에요. 헌책방을 찾는 다른 이들에게도 그런 곳이 되었으면 해요. 자신의 소중한 기억을 슬쩍 놓고 가는 곳, 다른 이들의 추억을 가져가는 곳이 되었으면 해요. 그래서 저는 요즘 편지를 씁니다. 제가 발견한 기억들과 느낌들 짧게나마 편지로 적어 책과 함께 드리고 있어요. 제가 찾은 것들 말고 다른 분들은 또 어떤 걸 찾게 될지 기대되네요. 기회가 되면 헌책방 살랑서원도 한 번 찾아주세요.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기억을 놓고 가셔도 되고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추억을 가져가셔도 된답니다. 궁금하지 않았던 궁금증을 푸는 곳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기대감을 만나는 곳, 헌책방 살랑서원 그리고 제가 헌책방에서 보내는 편지입니다.


종종 기대한 적 없는 손님이 찾아오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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